최소한의 과학 공부

최소한의 과학공부 저자 배대웅 출간 웨일북(whalebooks) 출간 2024.01.15. 최소한의 과학공부 저자 배대웅 출간 웨일북(whalebooks) 출간 2024.01.15.

1) 해부학과 외과의사의 탄생 ①갈레노스 의학집대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주치의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이후 이론적으로 더 의학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갈레노스’다. 그는 2세기 초 다양하게 내려온 의술을 학문으로 집대성했다. 갈레노스는 로마제국 5형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② 인체 해부 당시 인체 해부는 가톨릭 교리에 의해 엄격히 제한됐다. 대신 갈레노스는 검투사를 치료하면서 인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 동물을 해부하면서 인체를 유추했다. 당시에는 의학을 철학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치밀한 연역·노리를 더욱 중시했다. ③ 의사 vs 외과의사 중세에 해부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지만 학문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의학 수업에서도 외과 의사가 부검을 하는 동안 의사는 손을 뒤로 꼬고 서서 책을 강독하는 식이었다. 직업적인 의사와 외과 의사는 엄격하게 구분되며 영어 단어에서도 차이가 있다. ④ 의사의 Physician 생리학 physology에서 파생된 피지선 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 의사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의사는 곧 피지션이었고 대학에서 생리학 학위도 받아야 했으며 주로 환자를 치료했다. 1) 해부학과 외과의사의 탄생 ①갈레노스 의학집대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주치의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이후 이론적으로 더 의학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갈레노스’다. 그는 2세기 초 다양하게 내려온 의술을 학문으로 집대성했다. 갈레노스는 로마제국 5형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② 인체 해부 당시 인체 해부는 가톨릭 교리에 의해 엄격히 제한됐다. 대신 갈레노스는 검투사를 치료하면서 인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또 동물을 해부하면서 인체를 유추했다. 당시에는 의학을 철학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치밀한 연역·노리를 더욱 중시했다. ③ 의사 vs 외과의사 중세에 해부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지만 학문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의학 수업에서도 외과 의사가 부검을 하는 동안 의사는 손을 뒤로 꼬고 서서 책을 강독하는 식이었다. 직업적인 의사와 외과 의사는 엄격하게 구분되며 영어 단어에서도 차이가 있다. ④ 의사의 Physician 생리학 physology에서 파생된 피지선 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 의사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의사는 곧 피지션이었고 대학에서 생리학 학위도 받아야 했으며 주로 환자를 치료했다.

생리학 physiology에서 파생된 피지선 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 의사를 의미한다 생리학 physiology에서 파생된 피지선 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 의사를 의미한다

⑤ 외과의사 Surgeon⇒가 발사일 겸업 그리스어의 손과 일의 합성어로, 라틴어로부터 다시 영어로 Surgeon이 되었다. 즉 손의 기술자라는 뜻이다. 수술의 surgery도 결국 손기술이라는 뜻이다. 소정은 대학을 나올 필요가 없었고, 아버지나 선배에게 배운 칼을 사용하는 기술로 환자를 치료했다. 그리고 그 칼로 면도도 하고 이발도 했다. 그래서 서전의 위상은 제빵사나 양조업자와 비슷했다. ⑤ 외과의사 Surgeon⇒가 발사일 겸업 그리스어의 손과 일의 합성어로, 라틴어로부터 다시 영어로 Surgeon이 되었다. 즉 손의 기술자라는 뜻이다. 수술의 surgery도 결국 손기술이라는 뜻이다. 소정은 대학을 나올 필요가 없었고, 아버지나 선배에게 배운 칼을 사용하는 기술로 환자를 치료했다. 그리고 그 칼로 면도도 하고 이발도 했다. 그래서 서전의 위상은 제빵사나 양조업자와 비슷했다.

외과의사인 Surgeon 수기사라는 뜻이다. 수술 surgery도 결국 손기술이라는 뜻이다 외과의사인 Surgeon 수기사라는 뜻이다. 수술 surgery도 결국 손기술이라는 뜻이다

⑥ 랜싯(Lancet) 당시 외과의사의 주특기는 환자의 혈관을 바늘로 찔러 피를 빼는 시술인데 당시에는 만능 치료법으로 각광받았다. 중국이나 조선시대 왕을 섬기던 어의도 방혈을 주된 치료법으로 삼았다. 이 방혈에 쓰는 침이 랜싯 랜싯인데, 오늘날 의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저널의 이름이기도 하다. ⑦ 베사리우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16세기 들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갈레노스의 책을 읽고 해부학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29세의 의사인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를 해부해 쓴 역사상 첫 책을 발간한다. 그는 책에서 약 200곳의 갈레노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이 책의 백미는 300장이 넘는 해부도다. 해부도는 독일 화가 카르칼이 그린 것인데 인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⑥ 랜싯(Lancet) 당시 외과의사의 주특기는 환자의 혈관을 바늘로 찔러 피를 빼는 시술인데 당시에는 만능 치료법으로 각광받았다. 중국이나 조선시대 왕을 섬기던 어의도 방혈을 주된 치료법으로 삼았다. 이 방혈에 쓰는 침이 랜싯 랜싯인데, 오늘날 의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저널의 이름이기도 하다. ⑦ 베사리우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16세기 들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갈레노스의 책을 읽고 해부학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29세의 의사인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를 해부해 쓴 역사상 첫 책을 발간한다. 그는 책에서 약 200곳의 갈레노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이 책의 백미는 300장이 넘는 해부도다. 해부도는 독일 화가 카르칼이 그린 것인데 인체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베사리우스[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베사리우스[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해부하는 베사리우스 해부하는 베사리우스

⑦ 파도바대 해부학의 성지 베사리우스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베네치아는 르네상스 중흥기를 맞아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로 파도바대에서는 마음껏 해부 실습을 할 수 있었다. 한 판사는 처형된 죄수의 시신을 보내 부검 일정에 맞춰 처형 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다. 베사리우스는 직접 본인이 칼을 들고 부검 시범을 보였고, 강의실은 성황을 이뤘다. ⑧ 파도바대 해부학 실험실-파브리치우스 베시리우스의 제자인 파브리치우스는 1594년 세계 최초의 해부학 전용 강의 실습실을 만들었다. 마치 오페라 원형극장처럼 맨 밑에 해부대가 놓여 계층이 올라가고 관람석 공간이 넓어진다. 높은 곳에서도 부검 실험이 잘 보이도록 한 것이다. 해부학 실험을 공연처럼 볼 수 있는 이 실습실은 지금도 파도바의 관광명소다. ⑦ 파도바대 해부학의 성지 베사리우스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베네치아는 르네상스 중흥기를 맞아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로 파도바대에서는 마음껏 해부 실습을 할 수 있었다. 한 판사는 처형된 죄수의 시신을 보내 부검 일정에 맞춰 처형 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다. 베사리우스는 직접 본인이 칼을 들고 부검 시범을 보였고, 강의실은 성황을 이뤘다. ⑧ 파도바대 해부학 실험실-파브리치우스 베시리우스의 제자인 파브리치우스는 1594년 세계 최초의 해부학 전용 강의 실습실을 만들었다. 마치 오페라 원형극장처럼 맨 밑에 해부대가 놓여 계층이 올라가고 관람석 공간이 넓어진다. 높은 곳에서도 부검 실험이 잘 보이도록 한 것이다. 해부학 실험을 공연처럼 볼 수 있는 이 실습실은 지금도 파도바의 관광명소다.

베시리우스의 제자인 파브리치우스는 1594년 세계 최초로 해부학 전용 강의 실습실을 만들었다 베시리우스의 제자인 파브리치우스는 1594년 세계 최초로 해부학 전용 강의 실습실을 만들었다

해부학 실험을 공연처럼 볼 수 있는 이 실습실은 지금도 파도바의 관광명소다. 해부학 실험을 공연처럼 볼 수 있는 이 실습실은 지금도 파도바의 관광명소다.

⑨ 윌리엄 하비《갈레노스 권위의 무너뜨리고 파브리치우스》의 제자인 하비는 갈레노스가 주장한 혈액이 간에서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혈액이 심장에서 나와 몸을 순환하며 다시 심장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해 실제로 입증했다. 지금은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그때는 상식을 뒤엎는 발견이었다 ⑩ 외과의사의 지위 상승(코페르니쿠스 베사리우스 하비) 베사리우스와 하비를 거쳐 의학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확립한다. 마침 유럽에서는 과학혁명이 절정에 달해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의 책이 같은 해에 나왔고 하비가 혈액순환론을 제창한 뒤 이를 입증하는 현미경이 발명됐다. 자연스럽게 외과의사의 지위도 급상승한다. 해부학이 의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하지만 외과의사가 몸 안을 자유자재로 수술하는 것은 마취제가 개발된 19세기 중반에나 가능했다. ⑨ 윌리엄 하비《갈레노스 권위의 무너뜨리고 파브리치우스》의 제자인 하비는 갈레노스가 주장한 혈액이 간에서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혈액이 심장에서 나와 몸을 순환하며 다시 심장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해 실제로 입증했다. 지금은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그때는 상식을 뒤엎는 발견이었다 ⑩ 외과의사의 지위 상승(코페르니쿠스 베사리우스 하비) 베사리우스와 하비를 거쳐 의학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확립한다. 마침 유럽에서는 과학혁명이 절정에 달해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의 책이 같은 해에 나왔고 하비가 혈액순환론을 제창한 뒤 이를 입증하는 현미경이 발명됐다. 자연스럽게 외과의사의 지위도 급상승한다. 해부학이 의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하지만 외과의사가 몸 안을 자유자재로 수술하는 것은 마취제가 개발된 19세기 중반에나 가능했다.

하비가 혈액순환론을 제창한 뒤 이를 입증하는 현미경이 발명됐다. 이후 외과 의사의 지위는 급상승한다 하비가 혈액순환론을 제창한 뒤 이를 입증하는 현미경이 발명됐다. 이후 외과 의사의 지위는 급상승한다

2) 수술의 고통을 없앤 마취제 ①화타 마취제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관우의 팔 수술을 한 전설의 명의 ‘화타’다.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사용한 기록이 있지만, 제조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표주박에 아편, 대마, 만도레이크 같은 약재가 사용됐는데 마약과 같았다. ② 아산화질소 ⇒ 치과의사가 빼는 데 하인의 기분을 유쾌하게 해 웃음가스라고도 불린 아산화질소는 1844년 치과의사인 웰스가 파티에서 아산화질소를 마신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자 마취제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실제로 자신의 사랑니를 뽑아보니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몇 가지 공개 시연에서 실패했고, 그는 치과를 그만뒀다. 이후 치과의사협회는 그가 최초로 마취제 발견자임을 공인했다. ③ 에테르 마취제로 명성을 떨치는 웰스와 마취제를 연구한 제자 모튼은 1846년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에테르 마취 수술을 시행해 목 종양 제거 수술을 성공시켰다. 이 수술의 결과는 대서특필되었고, 에테르는 뛰어난 마취제로 명성을 떨쳤다 2) 수술의 고통을 없앤 마취제 ①화타 마취제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관우의 팔 수술을 한 전설의 명의 ‘화타’다.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사용한 기록이 있지만, 제조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표주박에 아편, 대마, 만도레이크 같은 약재가 사용됐는데 마약과 같았다. ② 아산화질소 ⇒ 치과의사가 빼는 데 하인의 기분을 유쾌하게 해 웃음가스라고도 불린 아산화질소는 1844년 치과의사인 웰스가 파티에서 아산화질소를 마신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자 마취제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실제로 자신의 사랑니를 뽑아보니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몇 가지 공개 시연에서 실패했고, 그는 치과를 그만뒀다. 이후 치과의사협회는 그가 최초로 마취제 발견자임을 공인했다. ③ 에테르 마취제로 명성을 떨치는 웰스와 마취제를 연구한 제자 모튼은 1846년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에테르 마취 수술을 시행해 목 종양 제거 수술을 성공시켰다. 이 수술의 결과는 대서특필되었고, 에테르는 뛰어난 마취제로 명성을 얻었다

1846년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에테르 마취 수술을 하고 목 종양 제거 수술을 성공시켰다. 그 후 에테르는 마취제로 이름을 날린다 1846년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에테르 마취 수술을 하고 목 종양 제거 수술을 성공시켰다. 그 후 에테르는 마취제로 이름을 날린다

④ ‘클로로폼’, ‘기독교인 반발’, 빅토리아 여왕이 진화 에테르라는 작은 열에도 쉽게 터져 냄새가 너무 싫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할 새로운 마취제 찾기에 나섰다. 클로로폼은 이런 과정을 거쳐 1847년 발견된다. 에테르보다 안전하고, 마취가 잘 되고,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를 발견한 산부인과 의사 심슨 덕분에 출산의 고통에 시달리던 산모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아픔도 신의 뜻이며 이를 없애는 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고, 특히 여성의 산마는 에덴동산에서 지은 원죄에 대한 벌이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은 황당하지만 당시는 진지한 사회적 담론이었다. 이 반대 여론을 불식시킨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공주와 왕자를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무통분만법으로 출산한 것이다. 종교보다 과학 편을 든 여왕은 진보적이었다. 이후 심슨은 의학 교과서에 이름을 올려 여왕의 주치의로 선정됐다. ⑤ 마취제의 변천(티오펜탈루나토리움⇒미다졸람⇒프로포폴) 클로로폼도 1937년 간 손상과 심실세동의 원인이 될 수 있어 더 이상 마취제로 쓰이지 않았다. 이후 수면마취 시대가 열리는데 티오펜탈나트륨은 초단기 전신마취제로 널리 이용됐다. 20세기 후반 들어 미다졸람과 프로포폴이 등장한다. 몸을 던지던 수술에서 수면 상태에서 몸의 병을 사전에 예방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④ ‘클로로폼’, ‘기독교인 반발’, 빅토리아 여왕이 진화 에테르라는 작은 열에도 쉽게 터져 냄새가 너무 싫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할 새로운 마취제 찾기에 나섰다. 클로로폼은 이런 과정을 거쳐 1847년 발견된다. 에테르보다 안전하고, 마취가 잘 되고,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를 발견한 산부인과 의사 심슨 덕분에 출산의 고통에 시달리던 산모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아픔도 신의 뜻이며 이를 없애는 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고, 특히 여성의 산마는 에덴동산에서 지은 원죄에 대한 벌이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은 황당하지만 당시는 진지한 사회적 담론이었다. 이 반대 여론을 불식시킨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공주와 왕자를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무통분만법으로 출산한 것이다. 종교보다 과학 편을 든 여왕은 진보적이었다. 이후 심슨은 의학 교과서에 이름을 올려 여왕의 주치의로 선정됐다. ⑤ 마취제의 변천(티오펜탈루나토리움⇒미다졸람⇒프로포폴) 클로로폼도 1937년 간 손상과 심실세동의 원인이 될 수 있어 더 이상 마취제로 쓰이지 않았다. 이후 수면마취 시대가 열리는데 티오펜탈나트륨은 초단기 전신마취제로 널리 이용됐다. 20세기 후반 들어 미다졸람과 프로포폴이 등장한다. 몸을 던지던 수술에서 수면 상태에서 몸의 병을 사전에 예방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유명인 남용으로 주목을 받은 프로포폴 유명인 남용으로 주목을 받은 프로포폴

3) X선 발견 ①음극선 실험 19세기 과학자들은 진공 속에 전류가 어떻게 흐르는지 알고 싶었다. 진공관이 발명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음극선의 정체를 밝히는 데 도전했다. 엑스레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1895년 음극선 실험 중 반대편 책상에 희미한 빛이 생겼고 몇 미터 떨어진 곳의 두꺼운 책도 열 정도로 투과력이 매우 강력했다. 일단 정체를 알 수 없어 미지수를 뜻하는 ‘X’로 명명했다. X선은 나무 고무 등 무엇이든 뚫고 나갔다. 두꺼운 납을 대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는 X선을 건판에 감광시켜 사진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내를 모델로 삼아 아내의 손 사진을 찍었지만 선명하게 뼈까지 노출됐다. 뢴트겐은 이 공로로 1901년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3) X선 발견 ①음극선 실험 19세기 과학자들은 진공 속에 전류가 어떻게 흐르는지 알고 싶었다. 진공관이 발명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음극선의 정체를 밝히는 데 도전했다. 엑스레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1895년 음극선 실험 중 반대편 책상에 희미한 빛이 생겼고 몇 미터 떨어진 곳의 두꺼운 책도 열 정도로 투과력이 매우 강력했다. 일단 정체를 알 수 없어 미지수를 뜻하는 ‘X’로 명명했다. X선은 나무 고무 등 무엇이든 뚫고 나갔다. 두꺼운 납을 대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는 X선을 건판에 감광시켜 사진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내를 모델로 삼아 아내의 손 사진을 찍었지만 선명하게 뼈까지 노출됐다. 뢴트겐은 이 공로로 1901년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X선은 매우 강력한 투과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정체를 알 수 없어 미지수를 뜻하는 ‘X’로 명명했다. X선은 매우 강력한 투과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정체를 알 수 없어 미지수를 뜻하는 ‘X’로 명명했다.

② 논문 발표 엑스레이로 의학이 눈부셔 발전 엑스레이는 서둘러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이 논문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었다. 엑스레이는 의사가 매우 유용하게 진료에 활용한 엑스레이 활용으로 진단하는 영상의학이 새롭게 태동했다. 다만 평면 촬영인 엑스레이는 대상의 깊이를 가능하게 하기는 어려워 입체적인 이해가 불가능했다. ③ 컴퓨터 단층촬영 CT 초기 엑스선의 한계를 극복하고 1970년 컴퓨터 단층촬영이 개발된다. CT는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여러 장의 X선 데이터를 합성해 입체적인 영상을 구현한다. 즉, 2차원인 X선을 3차원으로 구현한 것이다. CT 촬영으로 장기 질환과 뇌출혈 등에 대한 정밀 검사가 가능해졌다. 이 공로로 197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② 논문 발표 엑스레이로 의학이 눈부셔 발전 엑스레이는 서둘러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이 논문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었다. 엑스레이는 의사가 매우 유용하게 진료에 활용한 엑스레이 활용으로 진단하는 영상의학이 새롭게 태동했다. 다만 평면 촬영인 엑스레이는 대상의 깊이를 가능하게 하기는 어려워 입체적인 이해가 불가능했다. ③ 컴퓨터 단층촬영 CT 초기 엑스선의 한계를 극복하고 1970년 컴퓨터 단층촬영이 개발된다. CT는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여러 장의 X선 데이터를 합성해 입체적인 영상을 구현한다. 즉, 2차원인 X선을 3차원으로 구현한 것이다. CT 촬영으로 장기 질환과 뇌출혈 등에 대한 정밀 검사가 가능해졌다. 이 공로로 197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CT는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여러 장의 X선 데이터를 합성해 입체적인 영상을 구현한다. 즉, 2차원인 X선을 3차원으로 구현한 것이다. CT는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여러 장의 X선 데이터를 합성해 입체적인 영상을 구현한다. 즉, 2차원인 X선을 3차원으로 구현한 것이다.

④ MRI 자기공명영상 자기장 속 입자에 전자파를 대고 원자핵을 공명시켜 유기물 구조를 분석하는 자기공명기법(MRI)이 등장한다. 이 기술도 200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X선, CT, MRI 등 3개의 노벨상에서 인류에 기여한 영상의학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④ MRI 자기공명영상 자기장 속 입자에 전자파를 대고 원자핵을 공명시켜 유기물 구조를 분석하는 자기공명기법(MRI)이 등장한다. 이 기술도 200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X선, CT, MRI 등 3개의 노벨상에서 인류에 기여한 영상의학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자기장 속 입자에 전자파를 대고 원자핵을 공명시켜 유기물 구조를 분석하는 자기공명기법(MRI)이 등장하다 자기장 속 입자에 전자파를 대고 원자핵을 공명시켜 유기물 구조를 분석하는 자기공명기법(MRI)이 등장하다

⑤ 겸손한 인격자, 엑스레이, 엑스레이, 특허 등 모든 부를 거부, 엑스레이는 엑스레이가 우연한 발견이라며 스스로를 과대포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엑스레이에 대한 강연도 발표 직후 열린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바이에른 왕국이 주는 훈장을 받았지만 이름의 귀족 칭호 ‘퐁봉’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거절했다. 노벨 물리학상 상금도 모두 학교에 기부했고, 누가 봐도 엑스레이 특허는 큰돈을 벌 기회였다. 예를 들어 영국은 1623년 일찌감치 확립한 특허법 덕분에 산업혁명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몰리면서 이들이 부를 축적하고 산업도 발전하는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엑스레이는 여기저기 들어오는 엑스레이의 특허를 끝내 거절했다. 그는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자산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류애적 철학을 앞장서서 실천한 것이다. 엄청난 노력 끝에 인격자였던 엑스레이는 엑스레이라는 놀라운 우연을 얻기에 충분한 과학자였다. 4) 페니실린, 제2차 세계대전 판도 바꾼다. 노르망디의 성륙작전을 다룬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수많은 미군이 희생되지만, 그마저도 페니실린을 위해 수많은 부상자를 살려 전력을 강화했다. 페니실린은 원자폭탄, 레이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핵심 기술이다. ① 행운의 발견 1928년 플레밍이 독감 연구를 위해 실험용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평소 더러운 플레밍이 휴가 때 뚜껑을 닫지 않는 배양접시에 푸른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이 접시만 배양균이 죽었다. 여기서 생긴 푸른곰팡이가 강한 항균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페니실린이다. ⑤ 겸손한 인격자, 엑스레이, 엑스레이, 특허 등 모든 부를 거부, 엑스레이는 엑스레이가 우연한 발견이라며 스스로를 과대포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엑스레이에 대한 강연도 발표 직후 열린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바이에른 왕국이 주는 훈장을 받았지만 이름의 귀족 칭호 ‘퐁봉’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거절했다. 노벨 물리학상 상금도 모두 학교에 기부했고, 누가 봐도 엑스레이 특허는 큰돈을 벌 기회였다. 예를 들어 영국은 1623년 일찌감치 확립한 특허법 덕분에 산업혁명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몰리면서 이들이 부를 축적하고 산업도 발전하는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엑스레이는 여기저기 들어오는 엑스레이의 특허를 끝내 거절했다. 그는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자산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류애적 철학을 앞장서서 실천한 것이다. 엄청난 노력 끝에 인격자였던 엑스레이는 엑스레이라는 놀라운 우연을 얻기에 충분한 과학자였다. 4) 페니실린, 제2차 세계대전 판도 바꾼다. 노르망디의 성륙작전을 다룬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수많은 미군이 희생되지만, 그마저도 페니실린을 위해 수많은 부상자를 살려 전력을 강화했다. 페니실린은 원자폭탄, 레이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핵심 기술이다. ① 행운의 발견 1928년 플레밍이 독감 연구를 위해 실험용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평소 더러운 플레밍이 휴가 때 뚜껑을 닫지 않는 배양접시에 푸른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이 접시만 배양균이 죽었다. 여기서 생긴 푸른곰팡이가 강한 항균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페니실린이다.

일반적으로 지저분한 플레밍이 휴가 때 두께를 닫지 않는 배양 접시에 파란 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지저분한 플레밍이 휴가 때 두께를 닫지 않는 배양 접시에 파란 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② 대량생산 ⇒ 미국 진주만 습격 후 대량생산연구실에서는 1년 동안 많은 연구진이 달라붙어도 페니실린 1년에 고작 0.1g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하려면 대량생산이 중요했다. 플레밍의 뒤를 이은 연구자들이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에 대량생산을 요청한다. 미국은 진주만 습격 후 참전을 결정했고 선전포고 5일 뒤 미 정부는 페니실린의 긴급 생산을 결정한다. 미 농무부, 화이자 등 제약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③ 화이자-피저-대량생산 1942년 화이자로 묘안을 구상했고, 1944년 계획의 5배가 넘는 생산량이 쏟아졌다. 미 정부는 화이자의 동의를 얻어 이 제조법을 19개 기업에 공유하고 지원 물품과 자금을 마구 살포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90%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15%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② 대량 생산 ⇒ 미국 진주만 습격 후 대량생산연구실에서는 1년 동안 많은 연구진이 달라붙어도 페니실린 1년에 고작 0.1g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하려면 대량생산이 중요했다. 플레밍의 뒤를 이은 연구자들이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에 대량생산을 요청한다. 미국은 진주만 습격 후 참전을 결정했고 선전포고 5일 뒤 미 정부는 페니실린의 긴급 생산을 결정한다. 미 농무부, 화이자 등 제약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③ 화이자-피저-대량생산 1942년 화이자로 묘안을 구상했고, 1944년 계획의 5배가 넘는 생산량이 쏟아졌다. 미 정부는 화이자의 동의를 얻어 이 제조법을 19개 기업에 공유하고 지원 물품과 자금을 마구 살포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90%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15%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90%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15퍼센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90%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15퍼센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④ 국가와 과학의 파트너십 미국 정부는 14년 뒤 페니실린 합성법을 개발했고 페니실린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페니실린을 필두로 다양한 항생제의 등장은 인류의 수명을 크게 늘렸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병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 국가의 역할이 부각된 점도 중요하다. 5) 코로나19를 통해 본 과학기술의 중요성 ① 코로나 백신 개발 코로나 백신 개발에 미국이 추진한 ‘초고속 작전’이 대표적이다. 미 연방정부는 100억 달에 이르는 자금을 긴급 편성해 백신 개발을 지원했다. 엄격한 임상시험 단계도 대폭 줄이고 백신 개발에 걸리는 시간도 5~10년에서 임상 3상 통과까지 1년도 걸리지 않게 해줬다. 이 같은 성공은 과학지식 축적, 제약사의 적절한 전략, 국가 전폭적인 지원 등 3박자가 맞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④ 국가와 과학의 파트너십 미국 정부는 14년 뒤 페니실린 합성법을 개발했고 페니실린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페니실린을 필두로 다양한 항생제의 등장은 인류의 수명을 크게 늘렸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병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 국가의 역할이 부각된 점도 중요하다. 5) 코로나19를 통해 본 과학기술의 중요성 ① 코로나 백신 개발 코로나 백신 개발에 미국이 추진한 ‘초고속 작전’이 대표적이다. 미 연방정부는 100억 달에 이르는 자금을 긴급 편성해 백신 개발을 지원했다. 엄격한 임상시험 단계도 대폭 줄이고 백신 개발에 걸리는 시간도 5~10년에서 임상 3상 통과까지 1년도 걸리지 않게 해줬다. 이 같은 성공은 과학지식 축적, 제약사의 적절한 전략, 국가 전폭적인 지원 등 3박자가 맞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코로나 백신 개발에 공을 들인 미국은 임상 3상 통과까지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코로나 백신 개발에 공을 들인 미국은 임상 3상 통과까지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② mRNA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은 mRNA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mRNA는 전령 RNA나 메신저 RNA라고 부른다. RNA는 DNA로부터 유전정보를 받아 우리 몸의 기본이 되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포 속 DNA가 어떤 단백질을 만드는지에 대한 정보를 RNA에 전달하는데 이것이 전사(transcription)다. 이때 전사된 RNA가 mRNA이다. 비유하자면 RNA에는 우리 몸의 설계도(DNA)를 암호화해 생산공장(리보솜)으로 가져가 몸의 기본 재료(단백질)를 만들어내도록 복호화하는 것이다. ③ mRNA 연구 60년~1976년 헝가리 대학원생이 아이디를 내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을 했다. 이 대학원생이 바로 카트린 카리코다, 훗날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로 코로나19 바이어스 백신 개발을 이끈 인물이다. mRNA 기반 백신은 항원 대신 항원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넣는 것으로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 설계도 전략의 장점은 신속성과 유연성이다. 기존 대비 소규모 설비로 생산 가능하며 안정성도 강점이다. mRNA는 인체 내부의 물질이라 독성이 없다. mRNA가 세포 속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데 이를 MIT 교수와 연구진이 mRNA를 감싸면 세포 내부까지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했다.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변형 mRNA를 개발한 것이다. 이처럼 그야말로 백신 기반 기술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② mRNA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은 mRNA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mRNA는 전령 RNA나 메신저 RNA라고 부른다. RNA는 DNA로부터 유전정보를 받아 우리 몸의 기본이 되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포 속 DNA가 어떤 단백질을 만드는지에 대한 정보를 RNA에 전달하는데 이것이 전사(transcription)다. 이때 전사된 RNA가 mRNA이다. 비유하자면 RNA에는 우리 몸의 설계도(DNA)를 암호화해 생산공장(리보솜)으로 가져가 몸의 기본 재료(단백질)를 만들어내도록 복호화하는 것이다. ③ mRNA 연구 60년~1976년 헝가리 대학원생이 아이디를 내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을 했다. 이 대학원생이 바로 카트린 카리코다, 훗날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로 코로나19 바이어스 백신 개발을 이끈 인물이다. mRNA 기반 백신은 항원 대신 항원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넣는 것으로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 설계도 전략의 장점은 신속성과 유연성이다. 기존 대비 소규모 설비로 생산 가능하며 안정성도 강점이다. mRNA는 인체 내부의 물질이라 독성이 없다. mRNA가 세포 속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데 이를 MIT 교수와 연구진이 mRNA를 감싸면 세포 내부까지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했다.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변형 mRNA를 개발한 것이다. 이처럼 그야말로 백신 기반 기술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1976년 헝가리 대학원생이 ID를 내어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을 하였다 1976년 헝가리 대학원생이 ID를 내어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을 하였다

④ 모더나 백신을 만들기 위한 벤처기업이 설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 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mRNA를 기반으로 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주력 산업이다. 모더나는 민관 협력의 구심 같은 기업이었다. 창업 10년도 채 되지 않아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정상급 인재와 인프라를 구축했고, 이것이 바탕이 돼 mRNA 체내 전달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대박이 원천기술 덕분만은 아니었다. 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이었는데, 이곳은 보스턴 근교의 캠브리지 캔들스퀘어 켄들스퀘어로 상징되는 혁신 클러스터가 중요했다. 바로 미국 생명과학의 총아다. 캔들스퀘어에는 고위험-고수익 연구와 투자에 거침없는 문화가 존재한다. ④ 모더나 백신을 만들기 위한 벤처기업이 설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 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mRNA를 기반으로 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주력 산업이다. 모더나는 민관 협력의 구심 같은 기업이었다. 창업 10년도 채 되지 않아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정상급 인재와 인프라를 구축했고, 이것이 바탕이 돼 mRNA 체내 전달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대박이 원천기술 덕분만은 아니었다. 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이었는데, 이곳은 보스턴 근교의 캠브리지 캔들스퀘어 켄들스퀘어로 상징되는 혁신 클러스터가 중요했다. 바로 미국 생명과학의 총아다. 캔들스퀘어에는 고위험-고수익 연구와 투자에 거침없는 문화가 존재한다.

백신을 만들기 위한 벤처기업이 설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 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백신을 만들기 위한 벤처기업이 설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 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⑤ 우리나라의 과학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대한민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상황에서 K-방역으로 국민적 자존심을 한껏 높였다. 선진국이 방역에 실패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은 충격과 함께 우월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진국들이 초고속으로 백신을 생산해 대량 접종해 나가는데 우리는 그저 기다렸을 뿐이다. 바이러스 출현 3년이 지나도록 국산 백신 개발은 요원해졌다. 이미 촘촘하게 존재하는 선진국의 특허를 피해 개발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만큼 과학을 키우지 못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백신 주권 관점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성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⑤ 우리나라의 과학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대한민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상황에서 K-방역으로 국민적 자존심을 한껏 높였다. 선진국이 방역에 실패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은 충격과 함께 우월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진국들이 초고속으로 백신을 생산해 대량 접종해 나가는데 우리는 그저 기다렸을 뿐이다. 바이러스 출현 3년이 지나도록 국산 백신 개발은 요원해졌다. 이미 촘촘하게 존재하는 선진국의 특허를 피해 개발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만큼 과학을 키우지 못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백신 주권 관점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성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백신 주권 관점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성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백신 주권 관점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성찰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산화탄소는 특히 적외선을 잘 흡수하는데, 이는 상당한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는 특히 적외선을 잘 흡수하는데, 이는 상당한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② 19세기 온실효과 ⇒ 희망으로 여겨지는 19세기 소빙기에서 갓 벗어난 시기에 온실효과는 오히려 희망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소빙하기가 절정일 때 인류는 심각한 식량위기를 겪었고 사망률도 높았으며 전쟁도 잦았다. 이런 거친 분위기는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온실효과가 안락함과 풍요의 의미가 컸다. 7) 맨해튼 계획 원자력 개발핵분열의 파괴력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3개월 뒤 이를 보완하는 논문을 냈다. 여기에는 유명한 공식인 ‘E=mc2’, ‘질량-에너지 등가원리’로 불리는 공식이다. 빛의 속도를 매개로 에너지와 질량을 서로 연결했다는 데 있다. E=mc2는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변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원자 밖의 세계로 나올지는 아인슈타인도 몰랐다. ② 1932년 중성자 발견 원자핵 내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중성자가 발견되면서 원자핵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생겼다. 페르미는 주기율표의 모든 원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 보기로 한다. 그중 가장 무거운 92번 우라늄에 관심이 쏠렸다. 페르미는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새로운 93번 원소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우라늄보다 약간 무거운 원소를 분리해 1938년 노바상을 받는다. ③ 93번 원소, 더 작은 질량 2위안소(=핵분열) 실험 결과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더 작은 질량의 원소 2개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핵분열이다. 생물학 용어로는 세포 분열이지만 원자도 작은데 그 수만분의 1 크기의 원자핵을 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④ 핵분열⇒기하급수적 연쇄반응의 무서움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져 중성자 2개를 버리고 원자의 질량이 가벼워진다. 이때 줄어든 질량이 E=mc2에 따라 에너지로 바뀐다. 우라늄 하나가 분열할 때 나오는 에너지는 2억 볼트지만 남겨진 중성자들도 더 많은 핵분열을 일으키는데 핵분열의 무서움은 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연쇄반응에 있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만난 순간이다. ⑤ 아인슈타인과 실라르드의 편지 핵분열에서 엄청난 파괴력의 폭탄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대인 실라르드는 1933년부터 이 폭탄의 등장을 경고했고 1939년 핵분열 발견자가 독일인이었다. 당시 독일은 우라늄을 여기저기서 손에 넣고 있었다. 히틀러가 먼저 폭탄을 개발하면 대재앙이었다. 실라르드는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맨해튼 계획은 이 편지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편지는 1939년 10월 제2차 세계대전 개막 한 달 전에 전해진다. ⑥ 입자가속기 개발 1939년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입자가속기가 개발되면서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 나오는데 바로 94번 원소 플루토늄 Pu를 발견한 것이다. 사이클론으로 우라늄 235와 우라늄 238을 분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추출이 어려운 우라늄-235가 난제였지만 플루토늄은 그 돌파구가 된다. 임계질량도 적고 핵반응도 빨랐기 때문이다. ⑦ 군대가 총책임자로 미국은 1941년 대통령 직속의 과학개발국 OSRD를 설치하고 총책임자를 대령으로 정했다. 무엇보다 신속한 결정과 집행을 위해서다. 이후 의사결정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⑧ 3년 만에 성공, 얼마 안 되는 가능성만 보이는 엄청난 물량과 인력을 투입했지만 과학자들도 이처럼 대규모 지원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계획은 드디어 3년 만에 성과를 본다. 1945년 7월 뉴멕시코에서 테스트에 성공하고 한 달 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방 2개가 떨어진다. ⑨ 제3의 불을 얻은 인류, 경제성과 파멸을 모두 보유한 미국 정부는 1946년 원자력위원회를 설치해 맨해튼 계획을 민간에 이관한다. 이 연구소들은 오늘날 에너지 분야의 기초 연구를 이끌고 있다. 오늘날 인류가 누리는 에너지 기술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왔다. 우라늄 1g이 생산하는 에너지는 석탄 3.2t, 석유 267L와 맞먹는다. 그 후, 산업 활동이 양적, 질적으로 폭발했다. 반면 사고가 나면 주변을 황무지로 만들 위험이 있는 것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원자력의 압도적인 경제성에도 불구하고 대체에너지를 끝없이 찾는 이유다. 8) 미국과 소련의 로켓 개발 전쟁 ①폰 브라운(나치 출신 과학자) 로켓 새턴V 개발 미국은 달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 무엇보다 로켓 개발이 중요했다.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의 로켓으로 ‘세턴 V’라는 걸작을 만들었다. 1960년대 만든 이 로켓은 현재까지도 인간이 만든 비행체 중 가장 큰 엔진과 강한 추진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폰 브라운은 히틀러 직속의 로켓 개발 책임자였다. 그가 만든 것은 V2 로켓으로 1944년 영국 런던 극장에 명중해 567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1발의 미사일 공격으로 발생한 최대 인명피해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아군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폰 브라운은 악마의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 천재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1945년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은 이 과학자 포섭에 나선다. 나치는 원자폭탄 개발에는 실패했지만 항공 로켓 미사일 등에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로켓은 독일이 미국보다 25년 이상 앞섰다는 것이다. 물론 영국과 소련도 폰 브라운을 포섭하기 위해 협상을 벌였지만 폰 브라운은 100명이 넘는 연구팀(가족 포함 300명)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V2 개발자들은 그대로 아폴로 계획의 핵심 인재가 된다. ② 19세기 온실효과 ⇒ 희망으로 여겨지는 19세기 소빙기에서 갓 벗어난 시기에 온실효과는 오히려 희망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소빙하기가 절정일 때 인류는 심각한 식량위기를 겪었고 사망률도 높았으며 전쟁도 잦았다. 이런 거친 분위기는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온실효과가 안락함과 풍요의 의미가 컸다. 7) 맨해튼 계획 원자력 개발핵분열의 파괴력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3개월 뒤 이를 보완하는 논문을 냈다. 여기에는 유명한 공식인 ‘E=mc2’, ‘질량-에너지 등가원리’로 불리는 공식이다. 빛의 속도를 매개로 에너지와 질량을 서로 연결했다는 데 있다. E=mc2는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변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원자 밖의 세계로 나올지는 아인슈타인도 몰랐다. ② 1932년 중성자 발견 원자핵 내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중성자가 발견되면서 원자핵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생겼다. 페르미는 주기율표의 모든 원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 보기로 한다. 그중 가장 무거운 92번 우라늄에 관심이 쏠렸다. 페르미는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새로운 93번 원소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우라늄보다 약간 무거운

나치 출신의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의 로켓으로 ‘세탄 V’라는 걸작을 만들었다. 나치 출신의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의 로켓으로 ‘세탄 V’라는 걸작을 만들었다.

② 소련 ICBM 개발 소련은 1949년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떨어뜨릴 방법이 없었다. 소련은 이 차이를 한 방에 뒤집을 방법을 고민하는데 바로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개발이었다. 미국의 폰 브라운이 있었다면 소련에는 헬무트 그루트가 있었다. 그도 독일 출신 과학자지만 폰 브라운이 미국에 가면 그는 소련을 택한다. 그는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을 개발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발사한 인공위성이 스푸트니크 1호였다. ② 소련 ICBM 개발 소련은 1949년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떨어뜨릴 방법이 없었다. 소련은 이 차이를 한 방에 뒤집을 방법을 고민하는데 바로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개발이었다. 미국의 폰 브라운이 있었다면 소련에는 헬무트 그루트가 있었다. 그도 독일 출신 과학자지만 폰 브라운이 미국에 가면 그는 소련을 택한다. 그는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을 개발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발사한 인공위성이 스푸트니크 1호였다.

소련은 나치로부터 헬무트라는 기술자를 데려와 R-7이라는 ICBM을 발사시키고,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 성공시킨다 소련은 나치로부터 헬무트라는 기술자를 데려와 R-7이라는 ICBM을 발사시키고,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 성공시킨다

③ 아폴로 달 착륙선 성공 1969년 7월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케네디의 선언이 단 8년 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폰 브라운이란 능력자의 기술과 미국 정부, 과학계 등의 일치단결한 힘으로 단기간에 성공시킨 것이다. 요컨대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만약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의 목적이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거나, 바로 좌절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원래 아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했지만 17호에서 끝냈다. 냉전질서가 해체된 뒤 더 이상 달로 가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9) www 발명자-팀버너즐리 ①런던올림픽 ⇒팀버너즐리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뜻밖의 낯선 얼굴이 등장한다. 팀 버너스리라는 과학자다. 영국 출신 과학자라면 뉴턴, 다윈, 맥스웰 등 넘치지만 하필이면 이 사람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인류사회에 끼친 영향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버너스리는 인터넷의 기본 형식인 월드와이드웹ww의 발명자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발명품을 무료로 전 세계에 풀었다. 그래서 개막식에서 등장한 쇼의 주제가 바로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② 입자물리학 실험의 소통 문제 월드와이드웹은 뜻밖의 장소에서 탄생했다. 실험에 수천 명이 참가하는 거대 시설은 「CERN(=입자 물리학 연구소)」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 LHC가 있다. CERN 과학자들은 LHC에서 물질의 근원을 이루는 기본 입자를 충돌시키는 일을 한다. 그래서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원래 물리학의 최소 단위인 물질과 최대 단위의 우주는 별개로 존재했다. 그런데 빅뱅을 알게 되면서 이 질문이 하나로 통합된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뜨거운 상태로 시작해 먼저 빅뱅 직후 쿼크, 전자 등 기본 입자가 생긴다. 우주 온도가 낮아지면서 양성자, 중성자, 헬륨 원자핵, 원자가 만들어진다. 다시 원자가 중력에 의해 합쳐져 별과 은하가 탄생한다. 그래서 이런 기본입자를 깨면 우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③ 입자가속기 LHC⇒원소주기율표 93~118번 원소만 만드는 입자가속기는 원형인데 둥근 관을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질주하다 충돌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 과학자들은 이 순간을 포착한다. 가속기 곳곳에 검출기가 설치돼 충돌 순간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새로운 반응이 나오면 교과서가 바뀐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소주기표다. 현재 118개의 원소가 올라가 있지만 자연에서 발견된 것은 92번 우라늄까지다. 93번 이상의 원소는 가속기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③ 아폴로 달 착륙선 성공 1969년 7월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케네디의 선언이 단 8년 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폰 브라운이란 능력자의 기술과 미국 정부, 과학계 등의 일치단결한 힘으로 단기간에 성공시킨 것이다. 요컨대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만약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의 목적이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거나, 바로 좌절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원래 아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했지만 17호에서 끝냈다. 냉전질서가 해체된 뒤 더 이상 달로 가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9) www 발명자-팀버너즐리 ①런던올림픽 ⇒팀버너즐리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뜻밖의 낯선 얼굴이 등장한다. 팀 버너스리라는 과학자다. 영국 출신 과학자라면 뉴턴, 다윈, 맥스웰 등 넘치지만 하필이면 이 사람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인류사회에 끼친 영향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버너스리는 인터넷의 기본 형식인 월드와이드웹ww의 발명자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발명품을 무료로 전 세계에 풀었다. 그래서 개막식에서 등장한 쇼의 주제가 바로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② 입자물리학 실험의 소통 문제 월드와이드웹은 뜻밖의 장소에서 탄생했다. 실험에 수천 명이 참가하는 거대 시설은 「CERN(=입자 물리학 연구소)」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 LHC가 있다. CERN 과학자들은 LHC에서 물질의 근원을 이루는 기본 입자를 충돌시키는 일을 한다. 그래서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원래 물리학의 최소 단위인 물질과 최대 단위의 우주는 별개로 존재했다. 그런데 빅뱅을 알게 되면서 이 질문이 하나로 통합된다. 우주는 138억 년 전 뜨거운 상태로 시작해 먼저 빅뱅 직후 쿼크, 전자 등 기본 입자가 생긴다. 우주 온도가 낮아지면서 양성자, 중성자, 헬륨 원자핵, 원자가 만들어진다. 다시 원자가 중력에 의해 합쳐져 별과 은하가 탄생한다. 그래서 이런 기본입자를 깨면 우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③ 입자가속기 LHC⇒원소주기율표 93~118번 원소만 만드는 입자가속기는 원형인데 둥근 관을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질주하다 충돌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 과학자들은 이 순간을 포착한다. 가속기 곳곳에 검출기가 설치돼 충돌 순간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새로운 반응이 나오면 교과서가 바뀐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소주기표다. 현재 118개의 원소가 올라가 있지만 자연에서 발견된 것은 92번 우라늄까지다. 93번 이상의 원소는 가속기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입자가속기 LHC 입자가속기 LHC

입자가속기 LHC 입자가속기 LHC

주기율표 93번 이상의 원소는 가속기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주기율표 93번 이상의 원소는 가속기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④ 많은 사람의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WEB를 만들기 위한 ⇒’ 인콰이어 enquire LHC 대형 가속기는 검출기 크기도 엄청나다. 수백 명의 인력이 투입된다. LHC의 2012년 논문 저자는 무려 5154명이었다. 이런 이유로 입자물리학 실험에서는 상호 소통이 중요하다. 버너스리가 고민한 문제도 이것이었다. 연구소에서 자료 검색, 정리 목적으로 web을 만들었다. 버너스리는 연구소 곳곳의 컴퓨터가 거미줄 웹처럼 얽혀 실험 참가자들이 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는 체계를 구상했다. 오늘날 인터넷이 작동하는 방식의 원형인 것이다. 버너스리는 이 시스템에 ‘인콰이어 enquire’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의하다라는 뜻의 입자물리학 지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에 잘 어울리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 직원들이 남기는 논문 데이터, 실험 기록, 메모 등은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CERN은 워낙 사람들이 자주 바뀌는 조직이었고, 그래서 자료가 없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인콰이어는 이런 연구 자료를 조직화하는 동시에 효과적인 검색을 가능하게 했다. ④ 월드 와이드 웹 프로젝트 구상⇒ 1989년, www라는 명함 인콰이어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버너스리는 더욱 발전된 시스템을 제안한다. 그것은 하이퍼텍스트의 네트워크로 요약된다. 하이퍼는 초과한을 뜻하는 접두사다. 즉 초월 문서, 문서를 넘어선 문서라는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비순차성, 비선형성이다. 문서가 기존처럼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머무는 단계 없이 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1989년 버너스리는 이 시스템의 핵심은 보편성이라는 논지를 펼쳤고, 이러한 의미를 담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월드와이드웹www’라고 명명했다. 세계 컴퓨터를 정보의 그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또 하이퍼테스트를 기본 형식으로 채택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봤다. 프로젝트의 각 구성요소에 하이퍼텍스트의 약자 ht를 붙이기로 했다. 인터넷에 쓰이는 http, html 등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1990년 크리스마스에 버너스리(バーナーズリーはに最初)는 첫 번째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월드와이드웹의 최대 강점은 보편성과 접근성에 있다. 당시 컴퓨터 간 호환은 어려운 문제였다. 사용하는 언어와 운영체계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윈도, 도스, 리눅스 등 그런데 월드와이드웹은 업로드된 자료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리에 기반한다. 하이퍼링크라는 간단한 형태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⑤ 1993년 www 무료로 일반에 개방된 버너스리는 1993년 CERN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아 누구나 로열티 없이 서버와 브라우저를 제작·판매할 수 있게 했지만 이 조치는 월드와이드웹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 이를 계기로 네스케이프, 익스플로러와 같은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성도 높아졌다. ④ 많은 사람의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WEB를 만들기 위한 ⇒’ 인콰이어 enquire LHC 대형 가속기는 검출기 크기도 엄청나다. 수백 명의 인력이 투입된다. LHC의 2012년 논문 저자는 무려 5154명이었다. 이런 이유로 입자물리학 실험에서는 상호 소통이 중요하다. 버너스리가 고민한 문제도 이것이었다. 연구소에서 자료 검색, 정리 목적으로 web을 만들었다. 버너스리는 연구소 곳곳의 컴퓨터가 거미줄 웹처럼 얽혀 실험 참가자들이 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는 체계를 구상했다. 오늘날 인터넷이 작동하는 방식의 원형인 것이다. 버너스리는 이 시스템에 ‘인콰이어 enquire’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의하다라는 뜻의 입자물리학 지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에 잘 어울리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 직원들이 남기는 논문 데이터, 실험 기록, 메모 등은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CERN은 워낙 사람들이 자주 바뀌는 조직이었고, 그래서 자료가 없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인콰이어는 이런 연구 자료를 조직화하는 동시에 효과적인 검색을 가능하게 했다. ④ 월드 와이드 웹 프로젝트 구상⇒ 1989년, www라는 명함 인콰이어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버너스리는 더욱 발전된 시스템을 제안한다. 그것은 하이퍼텍스트의 네트워크로 요약된다. 하이퍼는 초과한을 뜻하는 접두사다. 즉 초월 문서, 문서를 넘어선 문서라는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비순차성, 비선형성이다. 문서가 기존처럼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머무는 단계 없이 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1989년 버너스리는 이 시스템의 핵심은 보편성이라는 논지를 펼쳤고, 이러한 의미를 담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월드와이드웹www’라고 명명했다. 세계 컴퓨터를 정보의 그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또 하이퍼테스트를 기본 형식으로 채택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봤다. 프로젝트의 각 구성요소에 하이퍼텍스트의 약자 ht를 붙이기로 했다. 인터넷에 쓰이는 http, html 등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1990년 크리스마스에 버너스리(バーナーズリーはに最初)는 첫 번째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월드와이드웹의 최대 강점은 보편성과 접근성에 있다. 당시 컴퓨터 간 호환은 어려운 문제였다. 사용하는 언어와 운영체계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윈도, 도스, 리눅스 등 그런데 월드와이드웹은 업로드된 자료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리에 기반한다. 하이퍼링크라는 간단한 형태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⑤ 1993년 www 무료로 일반에 개방된 버너스리는 1993년 CERN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아 누구나 로열티 없이 서버와 브라우저를 제작·판매할 수 있게 했지만 이 조치는 월드와이드웹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 이를 계기로 네스케이프, 익스플로러와 같은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성도 높아졌다.

1993년 인터넷 www는 무료로 일반에 공개된다 1993년 인터넷 www는 무료로 일반에 공개된다

1993년 인터넷 www는 무료로 일반에 공개된다 1993년 인터넷 www는 무료로 일반에 공개된다

10) 냉전과 알파넷 개발의 인터넷 월드와이드웹(www)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유되는 하이퍼텍스트의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작동하려면 다양한 네트워크를 표준화하는 프로토콜(=통신규약)이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에서 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TCP/IP이다. 그래서 인터넷은 TCP/IP를 따르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원형을 확립한 것이 알파넷 ARPAnet이었다. ① 미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ARPA 알파넷의 기본은 1969년 미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ARPA가 주도해 만들었다. 즉 군대에서 만든 것이다. 1958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 스푸트니크 위성의 충격에 대응해 2개의 조직을 설치했다. 하나는 항공우주 분야의 NASA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 부문의 ARPA다 ② ARPAARPA는 일반 군사 조직과 달리 유연한 방식으로 운영됐다. 즉, 독자적인 연구소를 설치하고 있지 않다. 대신 특채로 영입한 전문가들이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그때그때 필요한 기술을 외부에 위탁하는 형식을 취했다. 즉 민간과 군의 경계를 넘어 최고 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③ 최고기술 산실(GPS, 자율주행, 음성인식 등) ARPA의 높은 위상과 의사결정에 전권을 보장하는 운영방식 때문에 최고의 인재들이 꾸준히 모였다. 실제로 현대 사회를 바꾼 혁신적인 기술이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 GPS, 자율주행자동차, 음성인식기술, 스텔스기, 수술용 로봇 등 적용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ARPA 내부 서버를 연결한 알파넷도 그 중 하나였다. 10) 냉전과 알파넷 개발의 인터넷 월드와이드웹(www)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유되는 하이퍼텍스트의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작동하려면 다양한 네트워크를 표준화하는 프로토콜(=통신규약)이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에서 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TCP/IP이다. 그래서 인터넷은 TCP/IP를 따르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원형을 확립한 것이 알파넷 ARPAnet이었다. ① 미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ARPA 알파넷의 기본은 1969년 미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ARPA가 주도해 만들었다. 즉 군대에서 만든 것이다. 1958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 스푸트니크 위성의 충격에 대응해 2개의 조직을 설치했다. 하나는 항공우주 분야의 NASA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 부문의 ARPA다 ② ARPAARPA는 일반 군사 조직과 달리 유연한 방식으로 운영됐다. 즉, 독자적인 연구소를 설치하고 있지 않다. 대신 특채로 영입한 전문가들이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그때그때 필요한 기술을 외부에 위탁하는 형식을 취했다. 즉 민간과 군의 경계를 넘어 최고 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③ 최고기술 산실(GPS, 자율주행, 음성인식 등) ARPA의 높은 위상과 의사결정에 전권을 보장하는 운영방식 때문에 최고의 인재들이 꾸준히 모였다. 실제로 현대 사회를 바꾼 혁신적인 기술이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 GPS, 자율주행자동차, 음성인식기술, 스텔스기, 수술용 로봇 등 적용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ARPA 내부 서버를 연결한 알파넷도 그 중 하나였다.

ARPA에서 혁신기술이 속속 개발된 GPS, 자율주행자동차, 음성인식기술, 스텔스기, 수술용 로봇 등 적용분야를 가리지 않은 ARPA에서 혁신기술이 속속 개발된 GPS, 자율주행자동차, 음성인식기술, 스텔스기, 수술용 로봇 등 적용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④ 알파넷(ARPAnet) 국방부 대중에게 개방 냉전이 격화되면서 중요 군사정보도 그만큼 늘어나 만약 소련과 핵전쟁이 일어나 정보가 파괴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 대두됐다. ARPA는 서버를 4개 대학에 분산시키고 네트워크를 연결해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이러한 방식에 기반한 알파넷을 완성시키는데 적합한 프로토콜로서 TCP/IP를 도입한다. 알파넷이 고도화되면서 대학과 기업도 이것이 학문 연구와 제품 개발에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ARPA에 너도 나도 참여를 요청하는 상황이 빠르지만 결국 국방부는 알파넷을 민간에 개방하고 만다. 이로써 1990년대 인터넷이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⑤ 인터넷이 촉발한 혁명, 3차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www+알파넷=우리가 쓰는 인터넷), 인터넷은 입자물리학과 국방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촉발한 기술이 합쳐진 결과다. 월드와이드웹(www)이란 영국 혈통과 알파넷이라는 미국 혈통이 만나 탄생한 혼혈이다. 융합기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인터넷이 촉발한 사회 변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인간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이는 문서와 문서를 직접 연결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에 기인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구글과 네이버와 같은 검색엔진이다. 검색 엔진은 사람들의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었다. 기존의 책이나 신문, 텔레비전 등에서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는 것에서 이제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④ 알파넷(ARPAnet) 국방부 대중에게 개방 냉전이 격화되면서 중요 군사정보도 그만큼 늘어나 만약 소련과 핵전쟁이 일어나 정보가 파괴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 대두됐다. ARPA는 서버를 4개 대학에 분산시키고 네트워크를 연결해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이러한 방식에 기반한 알파넷을 완성시키는데 적합한 프로토콜로서 TCP/IP를 도입한다. 알파넷이 고도화되면서 대학과 기업도 이것이 학문 연구와 제품 개발에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ARPA에 너도 나도 참여를 요청하는 상황이 빠르지만 결국 국방부는 알파넷을 민간에 개방하고 만다. 이로써 1990년대 인터넷이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⑤ 인터넷이 촉발한 혁명, 3차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www+알파넷=우리가 쓰는 인터넷), 인터넷은 입자물리학과 국방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촉발한 기술이 합쳐진 결과다. 월드와이드웹(www)이란 영국 혈통과 알파넷이라는 미국 혈통이 만나 탄생한 혼혈이다. 융합기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인터넷이 촉발한 사회 변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인간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이는 문서와 문서를 직접 연결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에 기인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구글과 네이버와 같은 검색엔진이다. 검색 엔진은 사람들의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었다. 기존의 책이나 신문, 텔레비전 등에서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는 것에서 이제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터넷이 촉발한 사회 변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인간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검색 엔진으로 간단히 정보를 찾다 인터넷이 촉발한 사회 변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인간이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검색 엔진으로 간단히 정보를 찾다

둘째는 정치 경제적 변화다. 인터넷은 정보기술 기반의 거대한 신산업을 창출했다. 구글, 애플, 아마존,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은 인터넷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둘째는 정치 경제적 변화다. 인터넷은 정보기술 기반의 거대한 신산업을 창출했다. 구글, 애플, 아마존,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은 인터넷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은 구글, 네이버, 카카오 등 정보기술 기반의 거대한 신산업을 창출했다. 인터넷은 구글, 네이버, 카카오 등 정보기술 기반의 거대한 신산업을 창출했다.

세 번째는 정치적 이유다.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현대국가는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만 정치인들이 걱정하면 됐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선거 이외의 공간에서 국민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제는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당원이 직접 정치인의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과 미국의 44대 대통령, 오바마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세 번째는 정치적 이유다.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현대국가는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만 정치인들이 걱정하면 됐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선거 이외의 공간에서 국민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제는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당원이 직접 정치인의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과 미국의 44대 대통령, 오바마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유브 등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방송을 접하면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있다. 유브 등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방송을 접하면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있다.

인터넷의 기원을 1969년 알파넷에서 보면 3차 산업혁명도 이제 50년 넘게 진행 중이다. 초기 PC가 주도했던 인터넷의 영향력은 이제 모바일과 스마트폰이 이어받았다. 앞으로는 사물인터넷 IoT가 대세가 될 것이다. 이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예상하는 아직 인터넷 전성시대는 오지 않았다. 인터넷의 기원을 1969년 알파넷에서 보면 3차 산업혁명도 이제 50년 넘게 진행 중이다. 초기 PC가 주도했던 인터넷의 영향력은 이제 모바일과 스마트폰이 이어받았다. 앞으로는 사물인터넷 IoT가 대세가 될 것이다. 이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예상하는 아직 인터넷 전성시대는 오지 않았다.

앞으로는 사물인터넷 IoT가 대세가 될 것이다. 이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예상한다 앞으로는 사물인터넷 IoT가 대세가 될 것이다. 이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예상한다

11)국가가 지원한 과학단체 ①영국 런던 왕립학회 1660년 창립되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영국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은 이곳 회원들이다. 17세기 신문학에서 부상한 과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만든 연구회가 시초다*찰스 2세 그리니치 천문대 세움 2년 뒤 국왕 찰스 2세의 헌장도 받는다. 찰스 2세는 성군은 아니지만 과학 애호가였기 때문에 로열 로열이라는 명칭을 인정하고 스스로 회원이 됐다. 그는 1675년 항해술과 천문학 발전을 위해 그리니치 천문대를 세운다. 11)국가가 지원한 과학단체 ①영국 런던 왕립학회 1660년 창립되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영국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은 이곳 회원들이다. 17세기 신문학에서 부상한 과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만든 연구회가 시초다*찰스 2세 그리니치 천문대 세움 2년 뒤 국왕 찰스 2세의 헌장도 받는다. 찰스 2세는 성군은 아니지만 과학 애호가였기 때문에 로열 로열이라는 명칭을 인정하고 스스로 회원이 됐다. 그는 1675년 항해술과 천문학 발전을 위해 그리니치 천문대를 세운다.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 찰스 2세가 설립한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 찰스 2세가 설립한

미국 LA에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야경. 미국 LA에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야경

* 베이컨 왕립학회의 정신적 지주는 베이컨이었다. 왕립학회는 모토가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고 정하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베이컨의 철학을 집약했다. * 1687뉴턴 프린키피아의 출판 왕립학회에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면 왕립학회는 과학자들의 담론 모임에서부터 전문 학술단체로서의 위상을 높이게 된다. ②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설립(1666년) 정부가 기획했다. 콜베르 재무장관이 주도했다. 중상주의를 추진하던 콜베르의 정책노선과 같은 맥락이다. 국왕 루이 14세는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후원을 해주었다. 과학아카데미 과학자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대규모 연구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원으로 뛰어난 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라플라스(프랑스의 뉴턴)를 필두로 달랑베르, 라부아지에, 라그랑주 등이 꼽힌다.* 계몽주의 전파의 역할도 흥미로운 것은 과학자들의 이 단체가 계몽주의를 전파하고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와 군주의 지배는 논리적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자신들이 우대한 과학자들에 의해 시민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역설적 결과를 초래했다. 12) 산업혁명의 기원, 루날루나 소사이어티 산업혁명은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장기적인 변화다.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업혁명은 혁신적 지식 때문에 발생했다. ① 루나 소사이어티에 모인 지식인들(볼턴), 그 중심도시에 영국의 버밍엄이 있다. 18세기 중반 볼턴은 철물사업을 하면서 소호제작소를 운영했다.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공장으로 원자재 창고부터 설계실, 주물 작업장, 조립장, 완제품 창고 등 한 공간으로 집약됐다. 역사학자들은 소호제작소를 근거로 버밍엄을 최초의 산업도시로 보기도 한다. ② 볼턴 볼턴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과학자이자 지식인이었다. 동시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겼다. 그의 집인 소호하우스가 만남의 장소였는데 유명인들이 드나들었다.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프리스틀리, 기계공학자 존 윌킨슨,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엘라즈머스 다윈, 영국 최대 도자기사업자 웨지우드.. * 베이컨 왕립학회의 정신적 지주는 베이컨이었다. 왕립학회는 모토가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고 정하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베이컨의 철학을 집약했다. * 1687뉴턴 프린키피아의 출판 왕립학회에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면 왕립학회는 과학자들의 담론 모임에서부터 전문 학술단체로서의 위상을 높이게 된다. ②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설립(1666년) 정부가 기획했다. 콜베르 재무장관이 주도했다. 중상주의를 추진하던 콜베르의 정책노선과 같은 맥락이다. 국왕 루이 14세는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후원을 해주었다. 과학아카데미 과학자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대규모 연구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원으로 뛰어난 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라플라스(프랑스의 뉴턴)를 필두로 달랑베르, 라부아지에, 라그랑주 등이 꼽힌다.* 계몽주의 전파의 역할도 흥미로운 것은 과학자들의 이 단체가 계몽주의를 전파하고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와 군주의 지배는 논리적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자신들이 우대한 과학자들에 의해 시민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역설적 결과를 초래했다. 12) 산업혁명의 기원, 루날루나 소사이어티 산업혁명은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장기적인 변화다.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업혁명은 혁신적 지식 때문에 발생했다. ① 루나 소사이어티에 모인 지식인들(볼턴), 그 중심도시에 영국의 버밍엄이 있다. 18세기 중반 볼턴은 철물사업을 하면서 소호제작소를 운영했다.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공장으로 원자재 창고부터 설계실, 주물 작업장, 조립장, 완제품 창고 등 한 공간으로 집약됐다. 역사학자들은 소호제작소를 근거로 버밍엄을 최초의 산업도시로 보기도 한다. ② 볼턴 볼턴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과학자이자 지식인이었다. 동시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겼다. 그의 집인 소호하우스가 만남의 장소였는데 유명인들이 드나들었다.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프리스틀리, 기계공학자 존 윌킨슨,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엘라즈머스 다윈, 영국 최대 도자기사업자 웨지우드..

루나 소사이어티 엔에는 영국 최대의 도자기 사업가 웨지우드 Wedgwood도 있었다 루나 소사이어티 엔에는 영국 최대의 도자기 사업가 웨지우드 Wedgwood도 있었다

③ 주철 기술 전문가⇒ 달빛이 어느 밤에 모여 루나루나 소사이어티 당시 영국은 주철 기술이 왕성하게 발달했는데, 주철 공정의 핵심인 1500도 고온 유지에 이들 참가자가 전문가였던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연소실험을, 윌킨슨은 제철기술을, 웨지우드는 도자기를 자체 생산했다. 당시 가로등이 없던 시절 보름달이 뜨는 날 모임을 열어 모임 이름을 ‘루나 루나 소사이어티’라고 불렀다. ③ 주철 기술 전문가⇒ 달빛이 어느 밤에 모여 루나루나 소사이어티 당시 영국은 주철 기술이 왕성하게 발달했는데, 주철 공정의 핵심인 1500도 고온 유지에 이들 참가자가 전문가였던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연소실험을, 윌킨슨은 제철기술을, 웨지우드는 도자기를 자체 생산했다. 당시 가로등이 없던 시절 보름달이 뜨는 날 모임을 열어 모임 이름을 ‘루나 루나 소사이어티’라고 불렀다.

당시 가로등이 없어 보름달이 뜨는 날 모여 모임 이름을 ‘루나 소사이어티’라고 불렀다 당시 가로등이 없어 보름달이 뜨는 날 모여 모임 이름을 ‘루나 소사이어티’라고 불렀다

④ 제임스 와트 기존 증기기관 혁신 루나 소사이어티에 들어온 새 회원이 바로 제임스 와트였다. 그는 기존 증기기관의 효율을 크게 높여 산업에 쓰이도록 기여한 인물이다. 와트는 기존 뉴컴온이 만든 증기기관 개선안을 발견했다.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닌 외부 응축기에 모아 압축시키고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닌 증권사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1769년 새로운 증기기관 특허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용화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압력의 증기를 이용하면서 증기가 새지 않도록 한 패킹이 문제였다. 또 동업자가 파산해 와트에는 타격을 입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와트는 볼턴을 만났다. 볼턴은 급증하는 철물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하던 시기에 와트의 증기기관에 주목해 역사에 남을 동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와트는 수직운동뿐 아니라 회전운동까지 가능한 증기기관을 만들어 1785년까지 5개의 특허를 획득한다. 볼턴은 마케팅에도 일가견이 있어 와트가 막 출시한 증기기관에 멈춘 카피를 붙인다. 온 세상이 가지려고 하는 힘, 나는 그것을 팝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그리고 세상에, 세상에, ④ 제임스 와트 ⇒ 기존 증기기관 혁신 루나 소사이어티에 들어온 새 회원이 바로 제임스 와트였다. 그는 기존 증기기관의 효율을 크게 높여 산업에 쓰이도록 기여한 인물이다. 와트는 기존 뉴컴온이 만든 증기기관 개선안을 발견했다.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닌 외부 응축기에 모아 압축시키고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닌 증권사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1769년 새로운 증기기관 특허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용화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압력의 증기를 이용하면서 증기가 새지 않도록 한 패킹이 문제였다. 또 동업자가 파산해 와트에는 타격을 입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와트는 볼턴을 만났다. 볼턴은 급증하는 철물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하던 시기에 와트의 증기기관에 주목해 역사에 남을 동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와트는 수직운동뿐 아니라 회전운동까지 가능한 증기기관을 만들어 1785년까지 5개의 특허를 획득한다. 볼턴은 마케팅에도 일가견이 있어 와트가 막 출시한 증기기관에 멈춘 카피를 붙인다. 온 세상이 가지려고 하는 힘, 나는 그것을 팝니다. I sell here, sir. what all the world desires to have -POWER ”

증기기관 판매 카피 -> 전 세계가 갖고 싶어하는 힘, 저는 그것을 팔겠습니다. Isell here, sir. what all the world desires to have – POWER ” 증기기관 판매 카피 -> 온 세상이 갖고 싶어하는 힘, 저는 그것을 팝니다. I sell here, sir. what all the world desires to have -POWER ”

볼턴(왼쪽)과 와트는 2022년까지 영국 50파운드 지폐 인물이었다. 볼턴의 그림 밑에 ‘I sell here~’라는 카피가 새겨져 있다. 볼턴(왼쪽)과 와트는 2022년까지 영국 50파운드 지폐 인물이었다. 볼턴의 그림 밑에 ‘I sell here~’라는 카피가 새겨져 있다.

13) 증기기관의 연쇄효과 소형화된 증가기관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제분기, 직기, 기계와 수레와 배의 동력원으로도 사용되었다. 인간이 하던 여러 작은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게 된 ①면공업⇒대형화 증기기관은 면공업 직기에 가장 큰 효과가 있었다. 기존 수력직기는 물에 영향을 받았지만 증기기관은 공장 입자가 자유로웠다. 그 후 면공업은 대형화되었다. ② 제철업 영국의 철 생산량 급증 와트 증기기관은 제철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 넣어 영국의 철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늘었다. ③ 교통혁신 ⇒ 대항해시대의 시작 이야기 앞에 계절풍으로 달리던 배가 증기선으로 변해 빠르게 사람과 자원을 세계 곳곳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더해 기차와 철도가 연결되면서 문화와 지식의 교류도 크게 늘어나 진정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④ 시간⇒인류 절약, 지적 활동에 투여 교통의 혁신으로 무엇보다 시간이 줄었고, 인류는 그 시간을 다른 생산과 지식 활동에 투여해 더 많은 문명 발전을 이뤘다. 13) 증기기관의 연쇄효과 소형화된 증가기관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제분기, 직기, 기계와 수레와 배의 동력원으로도 사용되었다. 인간이 하던 여러 작은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게 된 ①면공업⇒대형화 증기기관은 면공업 직기에 가장 큰 효과가 있었다. 기존 수력직기는 물에 영향을 받았지만 증기기관은 공장 입자가 자유로웠다. 그 후 면공업은 대형화되었다. ② 제철업 영국의 철 생산량 급증 와트 증기기관은 제철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 넣어 영국의 철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늘었다. ③ 교통혁신 ⇒ 대항해시대의 시작 이야기 앞에 계절풍으로 달리던 배가 증기선으로 변해 빠르게 사람과 자원을 세계 곳곳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더해 기차와 철도가 연결되면서 문화와 지식의 교류도 크게 늘어나 진정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④ 시간⇒인류 절약, 지적 활동에 투여 교통의 혁신으로 무엇보다 시간이 줄었고, 인류는 그 시간을 다른 생산과 지식 활동에 투여해 더 많은 문명 발전을 이뤘다.

교통의 혁신으로 무엇보다 시간이 줄었고, 인류는 그 시간을 다른 생산과 지식 활동에 투여해 더 많은 문명 발전을 이뤘다. 교통의 혁신으로 무엇보다 시간이 줄었고, 인류는 그 시간을 다른 생산과 지식 활동에 투여해 더 많은 문명 발전을 이뤘다.

 

등유는 등불을 밝히는 석유라는 뜻이다. 석유의 대량 생산으로 사람들의 밤 생활이 풍요로워졌다. 등유는 등불을 밝히는 석유라는 뜻이다. 석유의 대량 생산으로 사람들의 밤 생활이 풍요로워졌다.

② 제2차 산업혁명⇒ 석유, 전기 석유의 대량 생산으로 미국인들은 밤늦게 불을 붙일 수 있었고,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책을 읽었다. 이는 산업에서 촉발된 생활양식의 혁명을 의미한다. 증기기관과 석탄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이제 새로운 양상인 석유와 전기라는 새로운 동력이 등장하면서 더욱 급진전된다. 자동화 연결성 유동성이라는 면에서 석유화 전기는 모든 에너지를 압도했다. 그만큼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했다. 20세기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수단의 원료로 쓰이면서 시너지가 대폭발했다. 이 시대를 2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한다. ② 제2차 산업혁명⇒ 석유, 전기 석유의 대량 생산으로 미국인들은 밤늦게 불을 붙일 수 있었고,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책을 읽었다. 이는 산업에서 촉발된 생활양식의 혁명을 의미한다. 증기기관과 석탄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이제 새로운 양상인 석유와 전기라는 새로운 동력이 등장하면서 더욱 급진전된다. 자동화 연결성 유동성이라는 면에서 석유화 전기는 모든 에너지를 압도했다. 그만큼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했다. 20세기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수단의 원료로 쓰이면서 시너지가 대폭발했다. 이 시대를 2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한다.

석유는 20세기에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 수단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시너지 효과가 크게 폭발했다 석유는 20세기에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 수단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시너지 효과가 크게 폭발했다

석유는 20세기에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 수단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시너지 효과가 크게 폭발했다 석유는 20세기에 등장한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운송 수단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시너지 효과가 크게 폭발했다

③ 미국이 주도 1차 산업혁명을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영국이 주도했다면 2차는 19세기 중반~20세기 초로 미국이 중심이 된다.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터전이 이동하면서 공장제 대공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 모든 혁명은 석유로부터 시작된다. ④ 석유 석유 petroleum은 그리스의 petro(암석)와 라틴어의 oleum(기름)의 합성어에 기인한다. 과학적으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탄화수소의 화합물을 의미한다. 즉 탄소c와 수소h가 결합된 여러 탄화수소 분자가 섞인 상태다. 끓는점차를 이용하여 분자량이 비슷한 구성성분(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윤활유, 아스팔트)을 분리한다. 이것이 바로 석유정제 기술이다. 17) 석유산업의 독점화 록펠러 석유는 고대 중동과 그리스에서는 건축물 방수에 아스팔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경에도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 역청을 썼다. 중세 이슬람에서 정제 기술이 발달해 등유를 사용했고, 이 기술은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① 1860년 석유, 특히 석유사업가인 록펠러는 석유유통과 정유에 집중하다 1870년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해 순식간에 경쟁자를 없애고 시장을 독점한다. 남은 건 동업자 밴더빌트밖에 없었다. ② 640km의 송유관 설치 록펠러는 송유관을 설치해 철도의 석유 유통을 대체한다. 그래서 원거리 시골에서도 기름을 싸게 빨리 공급받은 것이다. 액체자원으로서의 유동성이 뛰어난 석유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수많은 철도회사가 몰락하면서 1881년 스탠더드오일의 미국 석유 점유율은 95%를 기록한다. ③ 미국이 주도 1차 산업혁명을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영국이 주도했다면 2차는 19세기 중반~20세기 초로 미국이 중심이 된다.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터전이 이동하면서 공장제 대공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 모든 혁명은 석유로부터 시작된다. ④ 석유 석유 petroleum은 그리스의 petro(암석)와 라틴어의 oleum(기름)의 합성어에 기인한다. 과학적으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탄화수소의 화합물을 의미한다. 즉 탄소c와 수소h가 결합된 여러 탄화수소 분자가 섞인 상태다. 끓는점차를 이용하여 분자량이 비슷한 구성성분(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윤활유, 아스팔트)을 분리한다. 이것이 바로 석유정제 기술이다. 17) 석유산업의 독점화 록펠러 석유는 고대 중동과 그리스에서는 건축물 방수에 아스팔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경에도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 역청을 썼다. 중세 이슬람에서 정제 기술이 발달해 등유를 사용했고, 이 기술은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① 1860년 석유, 특히 석유사업가인 록펠러는 석유유통과 정유에 집중하다 1870년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해 순식간에 경쟁자를 없애고 시장을 독점한다. 남은 건 동업자 밴더빌트밖에 없었다. ② 640km의 송유관 설치 록펠러는 송유관을 설치해 철도의 석유 유통을 대체한다. 그래서 원거리 시골에서도 기름을 싸게 빨리 공급받은 것이다. 액체자원으로서의 유동성이 뛰어난 석유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수많은 철도회사가 몰락하면서 1881년 스탠더드오일의 미국 석유 점유율은 95%를 기록한다.

록펠러는 640리터의 파이프라인을 설치하고, 철도의 석유 유통을 대체할 록펠러는 640리터의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여 철도의 석유 유통을 대체할 것이다

③ 독점기업의 반독점법 의결, 이런 독점 조직은 미국의 다른 산업에서도 독점화를 부추겼다. 이는 의회가 1890년대 반독점법을 의결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스탠더드오일은 수십 개로 쪼개졌고 이후 액슨모빌, 쉐브론, 아모코 등으로 현재도 이어진다. 18) 전기산업과 에디슨 테슬라의 경쟁 ① 석유에 맞선 ‘전기의 에디슨’ 1879년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필라멘트를 중심으로 에디슨은 백열전구 개발에 성공한다. 백열전구라는 기술의 등장으로 석유회사가 큰 타격을 받는다. 이 에디슨의 가능성을 보고 거액을 투자하는 인물이 바로 JP모건이다. 그는 전기산업에서 얻은 막대한 수익을 발판으로 미국 최대 금융재벌로 성장한다. ② 전기산업 기원 전기의 기원은 패러데이가 개척하고 맥스웰이 완성한 전자기학이다. 에디슨은 패러데이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에디슨의 많은 발명품인 전신기, 전화기, 축음기, 백열전구, 전차 등은 에너지를 교묘하게 변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전자기학의 탁월한 응용자였다. ③ 에디슨 전등회사인 1880년 설립된 뉴욕의 에디슨 조명회사는 전기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앙발전소를 건설, 유지했다. 이 밖에 발전기, 송전 케이블, 백열 등의 생산업체를 만들었다. 전기 사용량 측정과 요금 측정하는 계량기도 에디슨이 발명한 것이다. 이처럼 에디슨은 전기 생산, 배송, 사용, 개량하는 시스템 전체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1882년 미국에 한 곳 있던 발전소가 1920년 4,000개에 육박했고 가정의 3분의 1이 전기를 사용했다. 조명뿐만 아니라 선풍기, 다리미, 청소기 등에도 전기가 사용된 ③ 독점기업의 반독점법 의결, 이런 독점 조직은 미국의 다른 산업에서도 독점화를 부추겼다. 이는 의회가 1890년대 반독점법을 의결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스탠더드오일은 수십 개로 쪼개졌고 이후 액슨모빌, 쉐브론, 아모코 등으로 현재도 이어진다. 18) 전기산업과 에디슨 테슬라의 경쟁 ① 석유에 맞선 ‘전기의 에디슨’ 1879년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필라멘트를 중심으로 에디슨은 백열전구 개발에 성공한다. 백열전구라는 기술의 등장으로 석유회사가 큰 타격을 받는다. 이 에디슨의 가능성을 보고 거액을 투자하는 인물이 바로 JP모건이다. 그는 전기산업에서 얻은 막대한 수익을 발판으로 미국 최대 금융재벌로 성장한다. ② 전기산업 기원 전기의 기원은 패러데이가 개척하고 맥스웰이 완성한 전자기학이다. 에디슨은 패러데이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에디슨의 많은 발명품인 전신기, 전화기, 축음기, 백열전구, 전차 등은 에너지를 교묘하게 변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전자기학의 탁월한 응용자였다. ③ 에디슨 전등회사인 1880년 설립된 뉴욕의 에디슨 조명회사는 전기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앙발전소를 건설, 유지했다. 이 밖에 발전기, 송전 케이블, 백열 등의 생산업체를 만들었다. 전기 사용량 측정과 요금 측정하는 계량기도 에디슨이 발명한 것이다. 이처럼 에디슨은 전기 생산, 배송, 사용, 개량하는 시스템 전체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1882년 미국에 한 곳 있던 발전소가 1920년 4,000개에 육박했고 가정의 3분의 1이 전기를 사용했다. 조명뿐만 아니라 선풍기, 다리미, 청소기 등에도 전기가 사용된

1879년에 백열전구라는 기술의 등장으로 석유 회사가 큰 타격을 받는다 1879년에 백열전구라는 기술의 등장으로 석유 회사가 큰 타격을 받는다

④ 테슬라의 잘나가는 에디슨 라이벌이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는 전기차 제조사의 이름으로 지금은 더 유명하지만 두 사람은 전기를 일류 생활 전반에 상용화시킨 천재라는 공동점이 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는 에디슨과 달리 테슬라는 수학과 과학이 뛰어나고 대학도 장학생으로 입학한 ⑤직류와 교류, 교류, 우승(테슬라)의 두 천재는 전기 공급 방식을 놓고 정면 충돌한다. 에디슨은 110V 직류를 채용했다. 하지만 이처럼 낮은 전압에서는 에너지 손실이 커서 멀리 보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발전소를 촘촘하게 지어야 했다. 물론 교류를 사용하면 손실을 줄일 수 있지만 교류로 작동하는 전동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를 해결한 것이 바로 테슬라였다. 그는 교류 유도 전등을 개발해 우수성을 설파했다. 테슬라는 1886년 조지 웨스팅하우스 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웨스팅하우스의 220볼트 교류 방식은 손실이 적고 원거리에서 전기를 보내고 변압기도 다루기 쉬웠다. ④ 테슬라의 잘나가는 에디슨 라이벌이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는 전기차 제조사의 이름으로 지금은 더 유명하지만 두 사람은 전기를 일류 생활 전반에 상용화시킨 천재라는 공동점이 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는 에디슨과 달리 테슬라는 수학과 과학이 뛰어나고 대학도 장학생으로 입학한 ⑤직류와 교류, 교류, 우승(테슬라)의 두 천재는 전기 공급 방식을 놓고 정면 충돌한다. 에디슨은 110V 직류를 채용했다. 하지만 이처럼 낮은 전압에서는 에너지 손실이 커서 멀리 보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발전소를 촘촘하게 지어야 했다. 물론 교류를 사용하면 손실을 줄일 수 있지만 교류로 작동하는 전동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를 해결한 것이 바로 테슬라였다. 그는 교류 유도 전등을 개발해 우수성을 설파했다. 테슬라는 1886년 조지 웨스팅하우스 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웨스팅하우스의 220볼트 교류 방식은 손실이 적고 원거리에서 전기를 보내고 변압기도 다루기 쉬웠다.

지금은 전기차 이름으로 유명한 테슬라는 교류 전기를 개발한 과학자로 유명하다 지금은 전기차 이름으로 유명한 테슬라는 교류 전기를 개발한 과학자로 유명하다

⑥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전기 대세 에디슨은 가짜뉴스를 퍼뜨리면서 교류전기에 대해 위험성을 넓혔지만, 결국 웨스팅하우스가 전기사업권을 따내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미국인들에게 교류의 안정성과 경제성을 알린 것이다. 화가 난 투자자 모건은 경쟁사였던 톰슨휴스턴과 합병해 에디슨을 내쫓고 만다. 이 합병한 회사가 제너럴 일렉트릭(=GE)이다. 이후 교류 전기는 대세가 됐고, 지금도 변하지 않은 19) 포드 자동차 혁명 에디슨 휘하에는 테슬라 외에 자동차 왕으로 불렸던 헨리 포드가 있었다. 포드는 1903년 에디슨으로부터 독립해 회사를 설립했다. ① 전기가 주류인 ⇒ 휘발유가 저렴하고 휘발유차가 주류인 초기 자동차의 동력원은 전기가 주류였다. 전기차의 등장은 1830년대에 올라간다. 1901년 독일 기계공학자 포르쉐는 전기차 배터리가 무겁다는 단점을 개선해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솔린 자동차가 역전된다. 기름값이 쌌기 때문이다. ② 포드의 모델 T 1908년 포드가 모델 T라는 미국 역사를 바꾼 자동차를 출시한다. 포도 모델 T는 생산 방식에서 혁신적이었다. 대량생산에 성공하고 판매가격을 대폭 낮춰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출고 시 850달러인 가격이 1915년 440달러, 1920년 290달러까지 떨어졌다. 포드는 도축장 고기 해체 라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자가 이동하지 않고 콘베이트가 자동으로 전달해준 물건을 조립만 하도록 해 시간 낭비를 최소화한 것이다. ⑥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전기 대세 에디슨은 가짜뉴스를 퍼뜨리면서 교류전기에 대해 위험성을 넓혔지만, 결국 웨스팅하우스가 전기사업권을 따내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미국인들에게 교류의 안정성과 경제성을 알린 것이다. 화가 난 투자자 모건은 경쟁사였던 톰슨휴스턴과 합병해 에디슨을 내쫓고 만다. 이 합병한 회사가 제너럴 일렉트릭(=GE)이다. 이후 교류 전기는 대세가 됐고, 지금도 변하지 않은 19) 포드 자동차 혁명 에디슨 휘하에는 테슬라 외에 자동차 왕으로 불렸던 헨리 포드가 있었다. 포드는 1903년 에디슨으로부터 독립해 회사를 설립했다. ① 전기가 주류인 ⇒ 휘발유가 저렴하고 휘발유차가 주류인 초기 자동차의 동력원은 전기가 주류였다. 전기차의 등장은 1830년대에 올라간다. 1901년 독일 기계공학자 포르쉐는 전기차 배터리가 무겁다는 단점을 개선해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솔린 자동차가 역전된다. 기름값이 쌌기 때문이다. ② 포드의 모델 T 1908년 포드가 모델 T라는 미국 역사를 바꾼 자동차를 출시한다. 포도 모델 T는 생산 방식에서 혁신적이었다. 대량생산에 성공하고 판매가격을 대폭 낮춰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출고 시 850달러인 가격이 1915년 440달러, 1920년 290달러까지 떨어졌다. 포드는 도축장 고기 해체 라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자가 이동하지 않고 콘베이트가 자동으로 전달해준 물건을 조립만 하도록 해 시간 낭비를 최소화한 것이다.

포드 T 모델은 출고 시 850달러의 가격이 1915년 440달러, 1920년 290달러까지 떨어졌다. 포드 T 모델은 출고 시 850달러의 가격이 1915년 440달러, 1920년 290달러까지 떨어졌다.

③ 포드의 혁신, ⇒ 노동자 복지 향상, 포드는 1914년 2.3달러의 일당을 5달러로 인상한다. 그리고 주5일 근무제도 실시한다. 노동자의 복지에 관여한 것이다. 근로자의 재무설계, 결혼, 교육 등도 지원한다. 이 같은 정책은 가격 인하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자동차의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포도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서 드라이브와 피크닉을 다니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④ 포드주의 ‘생산성 향상→대량생산→가격인하→대량소비→생산성 향상’의 선순환이 포도 경영철학의 핵심이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조차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포드주의는 자동차 산업, 나아가 제조업의 모델로 번져 20세기 민주주의 확산에도 기여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미국은 남성은 1868년, 여성은 1920년 투표권을 갖는다. 민주주의, 와인주의, 노동자의 지휘 상승은 서로를 촉진한다. ③ 포드의 혁신, ⇒ 노동자 복지 향상, 포드는 1914년 2.3달러의 일당을 5달러로 인상한다. 그리고 주5일 근무제도 실시한다. 노동자의 복지에 관여한 것이다. 근로자의 재무설계, 결혼, 교육 등도 지원한다. 이 같은 정책은 가격 인하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자동차의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포도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서 드라이브와 피크닉을 다니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④ 포드주의 ‘생산성 향상→대량생산→가격인하→대량소비→생산성 향상’의 선순환이 포도 경영철학의 핵심이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조차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포드주의는 자동차 산업, 나아가 제조업의 모델로 번져 20세기 민주주의 확산에도 기여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미국은 남성은 1868년, 여성은 1920년 투표권을 갖는다. 민주주의, 와인주의, 노동자의 지휘 상승은 서로를 촉진한다.

 

포드주의는 자동차 산업과 심지어 제조업의 모델로 확장되었고 20세기 민주주의의 확산에도 기여했다 포드주의는 자동차 산업과 심지어 제조업의 모델로 확장되었고 20세기 민주주의의 확산에도 기여했다

⑤ 포르쉐 벤츠 기술자, 포르쉐 창립 벤츠 엔지니어였던 그는 1931년 독립해 포르쉐를 창립한다. 그리고 1934년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어달라는 히틀러의 요청에 따라 폭스바겐 volkswagen의 비틀을 설계한다. 포르쉐는 포르쉐, 벤츠, 폭스바겐에 모두 관여한 엔지니어였다. ⑤ 포르쉐 벤츠 기술자, 포르쉐 창립 벤츠 엔지니어였던 그는 1931년 독립해 포르쉐를 창립한다. 그리고 1934년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어달라는 히틀러의 요청에 따라 폭스바겐 volkswagen의 비틀을 설계한다. 포르쉐는 포르쉐, 벤츠, 폭스바겐에 모두 관여한 엔지니어였다.

벤츠 엔지니어였던 포르쉐는 1931년 독립해 포르쉐를 창립한다. 히틀러의 부탁으로 폭스바겐 비틀을 설계하다 벤츠 엔지니어였던 포르쉐는 1931년 독립해 포르쉐를 창립한다. 히틀러의 부탁으로 폭스바겐 비틀을 설계하다

20)리튬이온전지 화석연료 없는 세상 ①이차전지=리튬이온전지(니켈리튬) 전지는 ‘전기가 솟아나는 연못’이란 뜻이다. 리튬이온전지는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화석연료 기반의 생산 활동을 바꿀 잠재력이 있다. 또 한 번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20세기 초 2차 산업혁명은 석유와 자동차가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리튬이온전지는 주로 IT와 스마트 산업의 진보처럼 해왔다. 1차 전지는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전지이지만, 2차 전지는 방전되더라도 수천 번의 재충전이 가능해 경제적이다. 이차전지의 총합인 리튬이온전지는 카드뮴 수은 납 등 중금속도 포함하지 않는다. 최초 2차전지는 니켈수소전지였지만 사용시간이 너무 짧았다. 노트북은 1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체품이 필요했다. 20)리튬이온전지 화석연료 없는 세상 ①이차전지=리튬이온전지(니켈리튬) 전지는 ‘전기가 솟아나는 연못’이란 뜻이다. 리튬이온전지는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화석연료 기반의 생산 활동을 바꿀 잠재력이 있다. 또 한 번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20세기 초 2차 산업혁명은 석유와 자동차가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리튬이온전지는 주로 IT와 스마트 산업의 진보처럼 해왔다. 1차 전지는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전지이지만, 2차 전지는 방전되더라도 수천 번의 재충전이 가능해 경제적이다. 이차전지의 총합인 리튬이온전지는 카드뮴 수은 납 등 중금속도 포함하지 않는다. 최초 2차전지는 니켈수소전지였지만 사용시간이 너무 짧았다. 노트북은 1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체품이 필요했다.

리튬이온전지의 개발로 가정용 가전제품의 무선화가 가능해졌다, 리튬이온전지의 개발로 가정용 가전제품의 무선화가 가능해졌다,

요트나 배에도 리튬 이온 전지로 동력 대신 편리하다 요트나 배에도 리튬 이온 전지로 동력 대신 편리하다

② 폭발 문제 리튬을 이용한 이차전지 연구는 1970년부터 시도됐다. 석유회사들이 대체에너지 개발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하지만 리튬이온전지는 폭발 등 불안정성 문제가 계속 상용화의 발목을 잡았다. ③ 요시노⇒2019년 노벨 화학상 수여 리튬 전지의 폭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일본의 요시노라고 하는 과학자였다. 1991년 요시노가 개발한 리튬이온 배터리가 소니를 통해 처음 출시됐다. 리튬이온전지의 상용화로 인간의 삶도 달라졌다. 충전하면 1시간 쓰던 노트북을 몇 시간은 쓸 수 있게 됐다. 많은 소형 가전기도 충전식으로 바뀌었다. 무선청소기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분노로 2019년 요시노는 노벨 화학상을 수여받았다 ② 폭발 문제 리튬을 이용한 이차전지 연구는 1970년부터 시도됐다. 석유회사들이 대체에너지 개발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하지만 리튬이온전지는 폭발 등 불안정성 문제가 계속 상용화의 발목을 잡았다. ③ 요시노⇒2019년 노벨 화학상 수여 리튬 전지의 폭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일본의 요시노라고 하는 과학자였다. 1991년 요시노가 개발한 리튬이온 배터리가 소니를 통해 처음 출시됐다. 리튬이온전지의 상용화로 인간의 삶도 달라졌다. 충전하면 1시간 쓰던 노트북을 몇 시간은 쓸 수 있게 됐다. 많은 소형 가전기도 충전식으로 바뀌었다. 무선청소기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분노로 2019년 요시노는 노벨 화학상을 수여받았다

리튬이온전지 폭발 문제를 해결한 일본 화학자 요시노가 201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리튬이온전지 폭발 문제를 해결한 일본 화학자 요시노가 201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④ 일본 노벨상 총 25명 중 2000년 이후 20명인 일본은 1949년 첫 노벨과학상을 받았다. 현재까지 수상자는 25명이다. 추이를 보면 초반에는 수상자가 드문드문 나왔지만 2000년 이후 급증하는 것이다. 25명 중 2000년 이후 수상자가 20명이다. 이는 일본의 R&D 투자와 노벨상 수상자까지의 시간차를 반영한 결과다. 노벨상은 통상 2030년 전 연구 성과에 수여된다. 리튬이온전지의 경우 1976년 첫 개발로 1991년 상용화를 거쳐 그 효과가 입증되기까지 20년이 걸린 것이다. ⑤ 19802000년 이후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가 급증한 이유는 1980년대에 있다. 1980년대는 일본의 성장이 정점에 달했던 거품경제 시대였다. 일본이 미국을 추격해 큰돈을 벌던 시기였다. 이때 상당 부분을 R&D에 과감히 쏟아 붓던 시기였다. 이때의 대규모 투자가 20~30년 뒤 노벨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가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와 같은 소재·부품·장비와 같은 상황에 다시 직면하지 않으려면 이런 기술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미래를 위한 R&D에 투자해 우리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④ 일본 노벨상 총 25명 중 2000년 이후 20명인 일본은 1949년 첫 노벨과학상을 받았다. 현재까지 수상자는 25명이다. 추이를 보면 초반에는 수상자가 드문드문 나왔지만 2000년 이후 급증하는 것이다. 25명 중 2000년 이후 수상자가 20명이다. 이는 일본의 R&D 투자와 노벨상 수상자까지의 시간차를 반영한 결과다. 노벨상은 통상 2030년 전 연구 성과에 수여된다. 리튬이온전지의 경우 1976년 첫 개발로 1991년 상용화를 거쳐 그 효과가 입증되기까지 20년이 걸린 것이다. ⑤ 19802000년 이후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가 급증한 이유는 1980년대에 있다. 1980년대는 일본의 성장이 정점에 달했던 거품경제 시대였다. 일본이 미국을 추격해 큰돈을 벌던 시기였다. 이때 상당 부분을 R&D에 과감히 쏟아 붓던 시기였다. 이때의 대규모 투자가 20~30년 뒤 노벨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가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와 같은 소재·부품·장비와 같은 상황에 다시 직면하지 않으려면 이런 기술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미래를 위한 R&D에 투자해 우리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은 1980년대 호황기에 R&D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그 결실이 노벨상으로 20~30년 뒤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1980년대 호황기에 R&D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그 결실이 노벨상으로 20~30년 뒤 나타나고 있다.

21) 빛의 혁명 ① 최초의 빛의 혁명 ⇒ 백열전구 ⇒ 화재 문제, 에너지 효율 5% 1879년 에디슨이 필라멘트 백열전구를 발명한다. 필라멘트가 고온의 백열 상태가 돼 빛을 내는 원리다. 백열전구는 뭔가 태워서 빛을 얻는 방식이라 에너지가 빛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고작 5%였다. 또 뜨거운 열로 화재 사고가 잦았다. ② 두 번째 빛의 혁명, 형광등, 수은, 중금속 문제, 에너지 효율 10%, 1940년대 형광등이다. 열을 동반하지 않고 유리관 안에서 수은가스를 방전시켜 자외선을 만들고, 이른바 형광물질이 다시 가시광선으로 바꾸는 원리다. 효율이 10%에 달했다. 다만 형광등에 포함된 수은이 인체에 유해한 유해증금속이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들면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 있어 폐형광등 관리비용도 상당 부분 필요했다. ③ 세 번째 빛의 혁명, 《LED》, 1990년대 초에 LED가 개발되었다. 밝기 단위인 루멘 lumen을 적용해 보면 와트당 백열전구는 16루멘, 형광등은 70, LED는 무려 300루멘이다. 백열전구는 1000시간, 형광등은 8000시간 쓸 수 있지만 LED는 수명이 3만 시간이다. 화재 위험이나 환경 문제도 없다. 그래서 백열전구와 형광등은 역사 뒤로 물러나게 됐다. 21) 빛의 혁명 ① 최초의 빛의 혁명 ⇒ 백열전구 ⇒ 화재 문제, 에너지 효율 5% 1879년 에디슨이 필라멘트 백열전구를 발명한다. 필라멘트가 고온의 백열 상태가 돼 빛을 내는 원리다. 백열전구는 뭔가 태워서 빛을 얻는 방식이라 에너지가 빛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고작 5%였다. 또 뜨거운 열로 화재 사고가 잦았다. ② 두 번째 빛의 혁명, 형광등, 수은, 중금속 문제, 에너지 효율 10%, 1940년대 형광등이다. 열을 동반하지 않고 유리관 안에서 수은가스를 방전시켜 자외선을 만들고, 이른바 형광물질이 다시 가시광선으로 바꾸는 원리다. 효율이 10%에 달했다. 다만 형광등에 포함된 수은이 인체에 유해한 유해증금속이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들면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 있어 폐형광등 관리비용도 상당 부분 필요했다. ③ 세 번째 빛의 혁명, 《LED》, 1990년대 초에 LED가 개발되었다. 밝기 단위인 루멘 lumen을 적용해 보면 와트당 백열전구는 16루멘, 형광등은 70, LED는 무려 300루멘이다. 백열전구는 1000시간, 형광등은 8000시간 쓸 수 있지만 LED는 수명이 3만 시간이다. 화재 위험이나 환경 문제도 없다. 그래서 백열전구와 형광등은 역사 뒤로 물러나게 됐다.

1990년대 초 LED가 개발됐다. 각종 제품에 쓰이지만 살규 우울증 치료에도 쓰인다. 1990년대 초 LED가 개발됐다. 각종 제품에 쓰이지만 살규 우울증 치료에도 쓰인다.

④ LED 적용 분야의 LED는 각종 가전제품이나. 조명, 자동차 등에 사용된다. 벽걸이 TV식대를 열고 자동차 전조등, 후미등, 방향지시등에 사용돼 디자인 제약이 크게 줄었다. 살균과 소독 효과도 뛰어나다. 우울증 치료에도 LED 조명을 활용한다. ④ LED 적용 분야의 LED는 각종 가전제품이나. 조명, 자동차 등에 사용된다. 벽걸이 TV식대를 열고 자동차 전조등, 후미등, 방향지시등에 사용돼 디자인 제약이 크게 줄었다. 살균과 소독 효과도 뛰어나다. 우울증 치료에도 LED 조명을 활용한다.

LED는 피부 치료나 우울증 치료에도 활용된다. LED는 피부 치료나 우울증 치료에도 활용된다.

⑤ LED⇒RGB삼원색이 흰색을 만드는 LED의 경우 색상이 가장 어려웠다.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시작해 파란색이 완성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빨강 Red, 초록 Green, 파랑 Blue가 모두 필요한 이유는 삼원색 RGB가 모여야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흰색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눈과 관련된 문제다. 망막에서 색을 담당하는 원추세포가 적색, 녹색, 청색이다. 인간이 느끼는 빛의 색은 이 원추세포에 인식된 빛의 세기다. RGB만으로 인간이 인식하는 색의 상당 부분인 800만 가지를 재현할 수 있다. 삼원색의 마지막인 청색 LED는 과학자들의 노력 끝에 수십 년 만에 완성될 수 있다. ⑤ LED⇒RGB삼원색이 흰색을 만드는 LED의 경우 색상이 가장 어려웠다.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시작해 파란색이 완성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빨강 Red, 초록 Green, 파랑 Blue가 모두 필요한 이유는 삼원색 RGB가 모여야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흰색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눈과 관련된 문제다. 망막에서 색을 담당하는 원추세포가 적색, 녹색, 청색이다. 인간이 느끼는 빛의 색은 이 원추세포에 인식된 빛의 세기다. RGB만으로 인간이 인식하는 색의 상당 부분인 800만 가지를 재현할 수 있다. 삼원색의 마지막인 청색 LED는 과학자들의 노력 끝에 수십 년 만에 완성될 수 있다.

우리 눈의 망막에서 색을 담당하는 원추세포가 적색, 녹색, 청색이다. 이 세 가지 색으로 8백만 가지의 색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 눈의 망막에서 색을 담당하는 원추세포가 적색, 녹색, 청색이다. 이 세 가지 색으로 8백만 가지의 색을 인식할 수 있다.

⑥ 청색이 어려운 이유광은 길이에 따라 전파→적외선→가시광선→자외선→X선으로 짧아지지만 전파에서 X선으로 갈수록 파장은 짧고 방출 에너지는 커진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파장대가 가시광선이다. LED는 전류를 흘려 빛을 내는 원리를 이용한다. 반도체인 두 전극 사이에 전류를 흐르게 하면 전기에너지가 발광한다. 두 전극은 양의 성질을 갖는 p형 반도체와 음의 성질을 갖는 n형 만도체를 붙여 만든다. 파장이 길고 에너지 차이가 작은 빛은 만들기 쉽다 그래서 적외선 LED는 매우 빨리 개발되었다. 1961년 개발됐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TV 리모컨이나 카메라 자동 초점의 붉은 빛인 것이다. 가장 까다로운 청색 LED는 1993년 마침내 개발됐다. 22)자연을 기계처럼 다루는(목적론기계론) ①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자연은 신이 통제) 중세까지 자연철학의 최고 권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독창적인 물질론, 운동론, 우주론을 창안하고 이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의 핵심은 자연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자연은 명확한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하나의 유기체다. 이를 목적론이라고 한다. 유기체로서 자연이 움직이는 목적을 누가 결정하는가? 신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논리적 탐구 대상으로 삼으면서, 가장 근원에 신이라는 불멸의 절대자가 존재함으로써 완벽해질 수 있었다. ② 17세기 단절과 전복의 시기, 17세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도전에 부딪힌다. 유럽에서 17세기는 단절과 전복의 시기다. 종교 갈등으로 촉발된 30년 전쟁(1618-48)이 전통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구축한다. 전쟁의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의 권위는 크게 실추된다. 대신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스위스 등 근대국가가 부상한다. 귀족들은 소멸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쟁취한다. 사상과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③ 기계론 (=자연은 통제가능)⇒ 경험주위 vs 합리주의 새로운 학문의 기수들은 자연현상에 목적이 없다고 봤다. 그들이 생각한 자연이란 단지 물질의 조합일 뿐이다. 자연이 운동하는 이유는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이 운동하는 목적이 아니라 메커니즘을 밝혀야 한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이 통제하고 인간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철학적 입장을 기계론 mechanism이라고 한다. 즉 자연을 기계처럼 인간이 다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어떻게 자연을 이해하고 조절하는가? 기계론은 이를 두고 크게 경험주의(empiricism)와 합리주의(rationalism)로 나뉘었다. ④ 아는 것이 힘이다 ⇒ 베이컨 경험주의 경험주의의 요체는 감각의 경험을 통해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현실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제1원리부터 모든 문제가 논증된다는 닫힌 체계였다. 이런 연역법은 논증의 전제가 참일 때만 옳은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각 전제의 진위 판별에는 무력하다. 영국의 베이컨은 경험주의를 학문으로 체계화했다.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귀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수많은 사실을 체계적으로 분류, 정리하여 일반화 수준을 높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주의는 우선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사실의 일반화가 가능하다. ⑤ 베이컨 ⇒ 지식→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쓰여야 한다. 베이컨이 지식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고 말하고, 이는 인간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 직접 개입하는 실천적 모습을 뜻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알고 있는 것=과학을 뜻한다. ⑥ 데카르트 합리주의 ⇒ 방법적 회의 합리주의의 목표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의 절대적 지식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유럽의 상황을 반영한다. 17세기 중세적 세계관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혼란을 틈타 회의론이 득세했다.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의 이론적 출발이다. 데카르트는 회의론의 논리적 힘을 받아들여야만 그들을 논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그는 방법적 회의를 극한으로 몰고 100% 확실한 것을 찾았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해 마지막에 남는 지식이 진리라는 게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⑦ 합리주의, ⇒ 이성의 능력, (수학)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세상의 진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가득하다. 관습, 경험, 선입견 등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베이컨의 경험은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합리주의는 사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있는데 바로 ‘수학적 지식’이라고 한다. 그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나는 의심한다’는 사실이다. 의심은 생각의 발로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⑧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공통점 첫째, 지식의 주체로서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에 두었다. 인간이 지식을 이용해 자연에 개입할 수 있는 주체가 된 베이컨은 인간이 자연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의 증대가 곧 학문의 진보라고 했다. 데카르트 철학의 목적은 인간의 복리를 도모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처럼 경험주의자와 합리주의자 모두 자연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기계로 인식했다. 둘째, 고유의 방법론을 확립하여 과학을 철학으로부터 독립시켰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자연을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규정해 과학적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경험주의는 실험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합리주의는 수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처럼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는 아직 미성숙한 과학에 실험과 수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부여했고, 이로써 과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3)뉴턴의 F=ma 뉴턴은 저서 프린키피아=원리에서 자연의 운동을 세 법칙으로 정식화했다. 관성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F=ma(힘=질량×가속도) 이 공식은 자연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힘과 속도의 관계를 ⑥ 청색이 어려운 이유광은 길이에 따라 전파→적외선→가시광선→자외선→X선으로 짧아지지만 전파에서 엑스선으로 갈수록 파장은 짧고 방출 에너지는 커진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파장대가 가시광선이다. LED는 전류를 흘려 빛을 내는 원리를 이용한다. 반도체인 두 전극 사이에 전류를 흐르게 하면 전기에너지가 발광한다. 두 전극은 양의 성질을 갖는 p형 반도체와 음의 성질을 갖는 n형 만도체를 붙여 만든다. 파장이 길고 에너지 차이가 작은 빛은 만들기 쉽다 그래서 적외선 LED는 매우 빨리 개발되었다. 1961년 개발됐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TV 리모컨이나 카메라 자동 초점의 붉은 빛인 것이다. 가장 까다로운 청색 LED는 1993년 마침내 개발됐다. 22)자연을 기계처럼 다루는(목적론기계론) ①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자연은 신이 통제) 중세까지 자연철학의 최고 권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독창적인 물질론, 운동론, 우주론

만유인력과 중력은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만유인력과 중력은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에 존재하는 끌어당기는 힘이다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에 존재하는 끌어당기는 힘이다

24)뉴턴의 법칙 ⇒ 결정론적 세계관 ① 결정론 뉴턴이 만든 새로운 세계관이 결정론이다. 결정론은 세상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언뜻 운명론이나 숙명론 같지만 근대 과학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근대 과학에서의 결정론은 원인을 알면 결과도 예측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뉴턴의 기획이 수학을 넘어 철학과도 연결되는 이유다. 결정론은 과학적 사유의 철학적 토대가 되지만 과학적이라는 규정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연결을 의미한다. 뉴턴은 자연과 우주를 인과관계로 구성했다. ② 뉴턴 역학의 일반화 신비, 미신 배척 뉴턴 역학은 17세기 기계론의 완결판이다. 지구와 우주가 운동하는 보편법칙을 확립해 우리가 접하는 자연현상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기계론이 목표로 삼은 ‘인과관계로서의 자연’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나 미신적 요소가 끼어들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과 무신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저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당연히 왕권의 새 수술 같은 신중심의 세계관과는 대립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이론적 무기를 뉴턴 역학에서 발견했다. 이처럼 중세 인류는 이러한 혁명을 거쳐 근대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25)계몽주의자들 ①커피와 계몽주의 이슬람에서 즐기던 커피를 1615년 유럽으로 들여온 것이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다. 1884년 토리노 엑스포에서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는 국민음료다. 커피는 초기에 이교도의 음료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 맛에 매료돼 커피를 허용했다. 유럽 상류층은 기존 와인과 맥주에서 커피를 마시고 맑은 마음을 깨우는 커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급상승한다. 24)뉴턴의 법칙 ⇒ 결정론적 세계관 ① 결정론 뉴턴이 만든 새로운 세계관이 결정론이다. 결정론은 세상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언뜻 운명론이나 숙명론 같지만 근대 과학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근대 과학에서의 결정론은 원인을 알면 결과도 예측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뉴턴의 기획이 수학을 넘어 철학과도 연결되는 이유다. 결정론은 과학적 사유의 철학적 토대가 되지만 과학적이라는 규정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연결을 의미한다. 뉴턴은 자연과 우주를 인과관계로 구성했다. ② 뉴턴 역학의 일반화 신비, 미신 배척 뉴턴 역학은 17세기 기계론의 완결판이다. 지구와 우주가 운동하는 보편법칙을 확립해 우리가 접하는 자연현상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기계론이 목표로 삼은 ‘인과관계로서의 자연’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나 미신적 요소가 끼어들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과 무신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저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당연히 왕권의 새 수술 같은 신중심의 세계관과는 대립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이론적 무기를 뉴턴 역학에서 발견했다. 이처럼 중세 인류는 이러한 혁명을 거쳐 근대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25)계몽주의자들 ①커피와 계몽주의 이슬람에서 즐기던 커피를 1615년 유럽으로 들여온 것이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다. 1884년 토리노 엑스포에서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는 국민음료다. 커피는 초기에 이교도의 음료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 맛에 매료돼 커피를 허용했다. 유럽 상류층은 기존 와인과 맥주에서 커피를 마시고 맑은 마음을 깨우는 커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급상승한다.

② 커피하우스&카페 영국의 커피하우스, 프랑스의 카페는 지식인 예술가들이 모여 사교의 장으로 거듭난다. 활발한 토론을 나눴고 토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집에 가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계속했다. 이때 형성된 지식인 네트워크를 편지공화국이라고 한다. 이 가상의 공화국은 거대한 학문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당시 편지는 지식 교류에 유용한 도구였다. 편지를 매개로 한 토론은 학술지 journal로 발전한다. 학술지 제목에 자주 쓰이는 letter의 기원도 여기에 있다. 커피 모임은 과학단체 결성으로도 이어진다. 1660명의 커피하우스에서 자주 만난 보일, 윌킨스 등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런던 왕립학회가 됐다. 과학 애호가였던 찰스 2세도 회원이 됐다. 여기서 뉴턴은 1687년 프린키피아를 출간하고 학회장까지 맡는다. 프린키피아는 편지공화국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교양인이 되면 꼭 알아야 할 필수 과목으로 여겼다. 이를 모르면 카페 토론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프린키피아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줬기 때문이다. 17~18세기 이런 생각을 공유한 사람을 계몽주의자라고 하는데, 모두 ‘빛(enlightment)’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무지와 인습 dml의 어둠을 이성의 빛으로 깨운다는 뜻이다. 형이상학보다는 경험과 과학을 중시했고, 권위와 특권보다는 자유와 평등을 앞세웠다. ③ 볼테르 ⇒뉴턴을 추종하다 볼테르는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다. ”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주장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당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의 유명한 명언이다. 볼테르는 평생 권력과 종교의 독선에 맞서 싸웠다. 볼테르는 뉴턴 역학에 주목했는데, 뉴턴 역학의 핵심은 우주가 하나의 원리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뉴턴을 열심히 알리며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데카르트는 우주에 가득 찬 에테르라는 신비한 물질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 행성이 회전한다고 했다. 프로코프 Procope 볼테르는 파리 국립극장 앞 카페 프로코프에서 하루에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84세까지 살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아이콘인 다른 사람들과 교류한다. 반체제 메시지를 담은 무신론, 관용론, 사회계약론을 확산시켰다. 볼테르는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한 최고의 보스였다. ② 커피하우스&카페 영국의 커피하우스, 프랑스의 카페는 지식인 예술가들이 모여 사교의 장으로 거듭난다. 활발한 토론을 나눴고 토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집에 가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계속했다. 이때 형성된 지식인 네트워크를 편지공화국이라고 한다. 이 가상의 공화국은 거대한 학문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당시 편지는 지식 교류에 유용한 도구였다. 편지를 매개로 한 토론은 학술지 journal로 발전한다. 학술지 제목에 자주 쓰이는 letter의 기원도 여기에 있다. 커피 모임은 과학단체 결성으로도 이어진다. 1660명의 커피하우스에서 자주 만난 보일, 윌킨스 등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런던 왕립학회가 됐다. 과학 애호가였던 찰스 2세도 회원이 됐다. 여기서 뉴턴은 1687년 프린키피아를 출간하고 학회장까지 맡는다. 프린키피아는 편지공화국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교양인이 되면 꼭 알아야 할 필수 과목으로 여겼다. 이를 모르면 카페 토론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프린키피아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줬기 때문이다. 17~18세기 이런 생각을 공유한 사람을 계몽주의자라고 하는데, 모두 ‘빛(enlightment)’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무지와 인습 dml의 어둠을 이성의 빛으로 깨운다는 뜻이다. 형이상학보다는 경험과 과학을 중시했고, 권위와 특권보다는 자유와 평등을 앞세웠다. ③ 볼테르 ⇒뉴턴을 추종하다 볼테르는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다. ”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주장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당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의 유명한 명언이다. 볼테르는 평생 권력과 종교의 독선에 맞서 싸웠다. 볼테르는 뉴턴 역학에 주목했는데, 뉴턴 역학의 핵심은 우주가 하나의 원리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뉴턴을 열심히 알리며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데카르트는 우주에 가득 찬 에테르라는 신비한 물질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 행성이 회전한다고 했다. 프로코프 Procope 볼테르는 파리 국립극장 앞 카페 프로코프에서 하루에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84세까지 살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아이콘인 다른 사람들과 교류한다. 반체제 메시지를 담은 무신론, 관용론, 사회계약론을 확산시켰다. 볼테르는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한 최고의 보스였다.

볼테르는 파리 국립극장 앞 카페 프로코프에서 하루에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프랑스 대혁명의 아이콘인 다른 사람들과 교류한다 볼테르는 파리 국립극장 앞 카페 프로코프에서 하루에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프랑스 대혁명의 아이콘인 다른 사람들과 교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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